이 땅에 ‘유일한’은 유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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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유일한’은 유일한가?
  • 이동우
  • 승인 2015.01.1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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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논설위원/정치학박사 이 동 우

새해가 시작된 지 10여일이 지났다. 먼저 지난번 칼럼에서 한 언론사 여론조사를 인용하며 앞으로 우리나라가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일찍 접으라고 해놓고는 스스로는 미련이 남아 ‘좋은 세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품은 자신을 어리석고 속없는 인간이라고 자책한다.

 

정부가 새해 벽두(劈頭)부터 담배 값 인상으로 서민들 속을 뒤집자마자 청와대는 이른바 ‘항명’으로 국민을 무시하고 경기도 의정부에서는 고층빌딩 화재로 128명의 사상자를 양산한다. 의정부 화재의 화재원인 조사 과정을 보면 결국 생명보다 물질을 더 중시하여 국민의 안전을 소홀히 한 인재(人災)로 볼 수밖에 없다. 새해 시작부터 또다시 절망이다.

 

우리 사회가 절망적인 이유의 뒷면에는 상류층의 이기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다. 사회지도층과 그 자손들의 병역 면제율, 투기와 탈세, 부(富)의 대물림을 위한 편법승계 등등. 가끔 국회 청문회를 통해 사회지도층이라는 인사들이 각종 부도덕한 위법 행위를 저지르고도 고위 공직을 맡겠다고 나서는 것을 볼 때마다 정나미가 떨어진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미국의 ‘빌 게이츠’(Bill Gates)와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의 선행은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워렌 버핏’은 ‘열정은 성공의 열쇠이고 성공의 완성은 나눔’이라 했다. 이렇게 부자가 된 뒤 부를 사회에 내놓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고 존경 받아 마땅한 일임에 틀림없다. 자기 재산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나라에도 천문학적인 재산을 모았으면서 애초부터 그 돈이 ‘내 것이 아니다’고 못 박았던 사람이 있었다. 우리에게 ‘안티프라민’으로 널리 알려진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柳一韓) 박사(1894~1971)가 그 장본인이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인 유일한은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신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라고 믿었다.

 

평양출신인 그는 9세 때 ‘미국의 문물을 배워 조국 동포를 구하라’는 부친의 말씀을 뒤로 하고 유학을 떠난 후 21년 동안 고학으로 미시간대학교를 거쳐 스텐포드대 로스쿨에서 국제법 박사가 된다. 유일한은 대학을 졸업한 뒤 그 고생을 자산으로 삼아 통조림 회사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둔다. 이어 그는 식민지 고국 행을 결행해 1925년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는 병든 동포들을 구해야한다며 의약품 업을 했고, 벌어들인 돈은 교육과 공익사업에 투자했다. 광복 후 유일한은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고 고려공과기술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9년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의 효시인 셈이다.

 
 유일한은 이승만정부의 상공부 장관 입각 요청도 거부하고, 정치자금 요청에도 일체 응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기업에선 엄두를 낼 수 없는 금액을 매번 세금으로 내자 당국에선 의약품을 함량을 속이는 게 틀림없다고 보고 조사를 했으나 함량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매사에 공과 사가 분명했다. 외국을 오가는 비행기 표는 물론 모든 비용을 자신의 주식배당금에서 공제하도록 했고, 공금을 사용하지 않았다.

 

1971년 유일한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유언장이 공개됐다. 손녀에겐 대학 졸업 때까지 학비 1만 달러를 주고, 딸에겐 땅 5천 평을 주면서 학생들이 뛰노는 공원을 꾸미라고 했다. 그리고 외아들은 대학까지 보냈으니 스스로 힘으로 살라며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나머지 그의 거대 재산은 모두 교육과 사회사업에 기증됐다. 1991년 타계한 딸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비롯하여 전 재산 205억 원을 공익재단에 기부하고 빈 몸, 빈 마음으로 떠났다.

 

탐욕과 이기심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부질없이 제2 제3의 ‘유일한’을 기대하는 속없는 새해가 열흘이나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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