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 36년 통한이 담긴 눈물 젖은 두만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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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 36년 통한이 담긴 눈물 젖은 두만강
  • 허성배
  • 승인 2015.01.2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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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 논설위원

  우리 민족의 역사와 애환이 담긴 통한(痛恨)의 대중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반세기가 넘도록 불러오면서 우리의 가슴을 절절히 적셔오고 있다.

 역사적인 이 노래가 생겨난 동기를 한국가요 사(박찬호 지음)를 통해 알아보기로 하자. 이는 우리 민족의 서사시라 할 만큼 일제 강점 36년의 통한이 맺힌 노래 가사이기도 하다.

 1930년대 중반 만주에는 독립군에 투신한 남편들을 수소문 하기 위하여 방황하는 우리나라 여인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시우 라는 젊은 음악가가 예원좌(藝苑 座)라는 극단의 일원으로 만주지방 공연차 다니던 중 두만강 변 중국 땅에 위치한 “도문”이라는 작은 마을의 아주 누추한 여관에 투숙해 올 때의 일이다.

 바로 옆방에서 어느 한 여인이 복받치는 울음을 삭이느라 밤새도록 훌쩍거리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연을 알아본즉 남편이 독립군으로 투신하여 활동하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애절하게 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길로 이시우 씨는 두만강 변에 가서 그 여인의 사연을 악장에 접목해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대중가요를 탄생시켰고. 당시 장 정월이란 소여 가수에게 가르쳐 막간에 무대에서 부르게 했다고 한다. 노래는 일제의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이주해 온 그곳 조선족의 교감 대를 타고 울음으로 소용돌이쳐 나갔다.

 그 후 서울로 돌아온 이 시우가 당시 인기가수였던 김정구에게 레코드에 녹음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감동한 김정구는 작곡가 박시춘(본명 · 박순동)에게 손질을 부탁하고. 작사가 김용호에게도 부탁하여 2절. 3절의 가사까지 만들어 오케이 레코드사에서 녹음하여 드디어 회한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탄생 하였다.

 이 노래가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하여 민족의 통한과 애절한 사연을 담고 망국의 한을 가진 민족의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렇듯 동포의 가슴에 절절히 파고들어 민족의 노래로 자리 잡게 되면서 민족의 공동체 의식이 확산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일제하의 조선총독부는 1943년 조선인을 자극하는 민족의 강한 노래로 낙인찍었고 이 노래는 음반발매 및 가창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노래는 민족의 생존과 더불어 한을 푸는 노래로 계속 애창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전 범죄에 대해 일말의 죄의식도 없이 역사를 손바닥 뒤집듯이 망언과 나치즘 헌법개정으로 재무장하여 침략전쟁을 획책하고 있는 짐승 만도 못한 왜구(倭寇)에 대해 아시아 각국은 물론 전 세계의 고립과 규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야수와도 같은 일본 아베 신조(安倍晉三) 정부는 지난해 8.15 광복절에도 국제전범이 합사되어있는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했는가 하면 위안부 강제동원과 강제노역. 수많은 애국독립군을 대학살 한 엄연한 사실을 일본역사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등 군국주의 침략근성을 되살리려 하고 있어 국제 규범과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는 것도 모자라 걸 빛 하면 독도가 자기 나라 영토라는 막가식 야수 같은 만행에 국제사회의 따돌림과 자멸 행위라는 사실을 일본 극우세력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일본 내각이 최근 집단적 자위권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사카타 마사히로(阪田雅裕) 전 법제국 장관은 법치주의라는 헌법의 기본 이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보도했는데 사카타 전 장관은 일본은 국제법상 적법한 모든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가 된다고 지적했다.

 악랄한 극우파 아베 총리는 최근에도 법제국 장관을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적극 적인 고마쓰 이치로(小松一郞)를 주. 프랑스대사로 교체하는 등 자위권 도입에 필요한 준비를 본격화하고있고 위안부문제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고 노골적으로 명문화 하고있어 국내외적으로 크게 비판받고 있다.

 한편 2차 대전 당시 A급 국제전범 14명을 극비리에 야스쿠니에 합사한 것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1978년 야스쿠니신사는 당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분류돼 사형되거나 옥중에서 사망한 14명의 전범을 쇼화(昭和) 시대의 순난자(殉難者)라는 이름으로 합사했다. 한국과 중국이 문제 삼는 대목도 바로 이 부분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뚜렷하던 1944년 말 가미카제(神風) 자살 결사대원들은 이 말을 남기고 전장으로 떠났다. 전투기를 타고 당시 미국 군함에 돌진(진주만공격)하는 군인들은 야스쿠니의 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없앴다고 하는 역사적인 비화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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