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 털어 원고료 준 편집주간
상태바
사재 털어 원고료 준 편집주간
  • 장세진
  • 승인 2015.03.24 14: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세진/한별고교사·문학평론가

  이런저런 모임이나 문학회에서 만나 교유해오던 이들이 세상을 달리하고 있다. 지지난해 라대곤 소설가에 이어 작년엔 시인 여러 명이 작고했다. 그리고 얼마 전 정희수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났다. 1945년생이니 그렇게 서둘러 갈 나이는 분명 아니다. 입원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듯 급하게 우리 곁을 떠날 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지난 겨울 혹독하게 몰아친 한파 때문이었을까. 고래희(古來稀)에 접어든 정희수 시인은 그의 시 <꽃샘추위>의 “아직 나무들 햇살 한 줌/제대로 쥐어보지도 못했는데/왠 추위는 그렇게 매운 것인지/아침나절 찾아왔던 까치/물고 왔던 풀씨는 싹도 못내고/더구나 실뿌리도 뻗지 못해/몸 웅크리고 쓸쓸히 뒤돌아갔다.”처럼 너무 허망하게 가버렸다.

  막상 떠나고 나니 그가 그냥 시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1987년 <월간문학>, 이듬해 <시대문학>신인상으로 등단, <물의 길>, <풀꽃을 위하여> <내가 바라보는 하늘> 등 8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 맞지만, 그는 타계 직전까지도 어느 월간 문학지 편집주간이었다. 내 통장엔 2014년 12월 26일 ‘보낸 이, 정희수’의 원고료 입금 내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월간지에 영화평을 연재한 건 2012년 4월호부터다. 당연히 정희수 주간의 청탁이 있어서였다. 원고료 없으면 안한다고 했더니 많이는 못 준다며 꼭 써달라고 했다. 그러기를 3년. 너무 ‘장기집권’ 아닌가 하여 2년쯤 되었을 때 그만두려 했으나 정희수 시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적은 원고료라곤 하지만, 내가 먼저 그만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난 1월, 그러니까 원고료 입금후 우편으로 받곤 하던 잡지 신년호가 오지 않았다. 배달사고라도 난 것인지 메일을 보냈으나 며칠간 ‘읽지 않음’으로 있었다. 전화 역시 불통이었다. 가까스로 통화가 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건 뜻밖에도 아들이었다. 와병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많이 좋아진 상태라 듣기도 했다.

  이후 잡지 발행인 겸 편집장과 통화하여 잡지 신년호를 받았다. 다음 호 원고도 두 번 더 보냈으나 원고료는 미입금이었다. 메일로 편집장에게 문의했더니 본사 차원에서 원고료를 지급한 적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정희수 시인이 사비를 들여 3년 동안 원고료를 꼬박꼬박 보내온 것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나뿐만이 아니다. 정희수 시인이 섭외한 이 지역 작가들은 10여 명에 이른다. 물론 나처럼 3년을 계속 연재한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들에게 소액이라도 원고료를 지급해왔다면 이건 사비가 아니라 ‘사재’를 털어 편집주간을 해온 것이 된다. 퇴원 후 만나면 그 이야길 꼭 해야지 했는데….

  정희수 시인은 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평론가인 내가 문인시화전에 난생 처음 시를 출품한 것은 순전 그의 덕분이다. 전주동암고등학교장 등 같은 교단에 있어서였는지 10년쯤 후배인 나를 각별히 예뻐해서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출품할 용기를 냈다.

  지금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는 <정거장>이란 시다. 연전에 정지용백일장 대상을 받은 시였지만, 액자로 표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걸 정희수 회장이 ‘공짜로’ 만들어준 것이다. 전시 마친 액자를 찾으러 그에게 갔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벌써 9년 전쯤의 일이다.

  아무리 왔다 가는 길이라지만 너무 빨리 가버린 정희수 시인은 노송문학회장 때 글쓰기 재능이 있는 중?고생을 선발, 소정의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또 한국녹색시인협회장, 한국녹색문학아카데미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남긴 발자취가 적지 않다. 한편 목조근정훈장을 비롯 전북문학상?백양촌문학상?아시아시인상?한국녹색시인상 등도 수상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