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와 상부상조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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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상부상조 정신
  • 허성배
  • 승인 2015.08.3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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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 논설위원

학문을 닦아 학덕(學德)을 갖춘 사람을 옛사람들은 선비라 했다. 지금은 써먹지 않는 옛말이 되고 말았다. 옛날 선비들은 벼슬을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학문을 하였다.

학문이 성취되면 위에서 천거하여 벼슬길에 나가기는 했지만. 오늘날처럼 사법고시니 행정고시를 거쳐 벼슬길을 찾으려고 공부하는 사람을 선비라고 하지 않았다. 부모의 희망과 문호(門戶)의 계책을 위해 고등고시에 통과되었다 하더라도 마땅히 자기의 포부를 중히 여겨 탐독하고 열중하는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선비라 할 것이다.

선비의 조건으로 학문하는 행위를 빼놓을 수는 없지만. 더욱 앞서 중요한 것은 덕을 쌓는 일이다. 빼어난 두뇌에다 노력을 더하면 학문을 크게 이루고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할지라도. 부모 섬기기를 싫어하고 형제와 이웃 간에 화목하지 못하면 덕을 잃은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선비는 학덕을 겸비한 사람을 지칭한다.

학문은 머리로 이룰 수 있지만. 덕은 사상이요.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학문을 높이 쌓아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육법전서를 줄줄 외워대도 행동이 치졸하면 우세스럽다. 지금 국가의 중책을 담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법. 행정. 외무. 기술고시 등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종사하는 분야의 학문에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일은 옳고 바르고 수범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큰 부정. 큰 비리 (일부 정치권은 물론. 일부 공직자 비리 등)의 주인공 중에는 높은 학문을 얻어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선비 정신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선비는 학문을 통해 진위를 가리며 덕으로 세상을 다스린다. 제 욕망을 다 채우고 나면 옆 사람은 빈 그릇이 될 것을 알면서 제 몫이 만 챙기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늘 질서가 없이 시끄럽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선비 정신이다. 춥다 하여 털옷을 찾으려고 몸을 받지 않고.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선비 정신의 결여 때문에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세상은 늘 어지럽다. 한 가정이 바로 서려면 개개의 가족이 제 직분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도리다. 도리는 이치를 따르는 길인데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국가나 정부도 모두 제대로 되는 일이 없거니와 파국이 따를 뿐이다.

같은 이치에서 조직사회의 집단이 흥하고 망하는 것은 곧 선비정신이 있고 없음에 달려있다. 대개의 사람은 양보하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제 주장을 굽혀 남의 의견을 좇거나. 자신이 앉아야 할 자리를 남에게 내주는 것을 양보라 한다. 그러므로 양보는 미덕이요. 상대방으로부터 감사와 존경심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 손해 본다는 행위가 될 수 없다.

선비는 행동이 급하지 않다. 급하지 않기 때문에 신중히 따르고 무거움이 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인격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재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재주란 사람만이 전유한 능력은 아니다. 운전에 능숙한 재간을 가진 기사들은 교통체증으로 정지된 네거리에서 재빨리 빠져나가는 재주가 있다. 눈치가 빠르고 요령에 능란하여 남의 차와 차 사이를 곡예 하듯 빠져나간다. 그런데 교통사고 주인공들은 초보자보다 재주꾼들이 많다.

우리네 속담에 물을 좋아하면 물에서 죽고. 나무 오르기를 좋아하면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말이 있다. 제 재주만 믿고 절차나 도리. 이치와 진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요령으로 일시적인 욕망이나 충족은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얼마 못 가 들통 나게 마련이다. 이 땅의 선비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 땅의 5천 년 역사와 전통의 맥을 이어온 양보 정신. 협조 정신. 상부상조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정견발표장에서 너 잘났다고 큰소리치는 사람. 고등고시 합격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 기술자라고 뽐내는 사람. 가진 것이 많다고 거들먹대는 졸부들이 선비 정신만 가질 수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 가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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