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시진핑과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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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시진핑과 박근혜
  • 허성배
  • 승인 2015.10.26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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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논설위원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을 이끌게 된다.

 임기 중에 한반도에는 결정적인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1990년 독일 통일을 지켜본 소련 지도자는 고르바초프였다. 어쩌면 시진핑은 한반도 통일을 목격하는 중국 지도자가 될지도 모른다.

 완전 통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통일 과정이 시작될 수는 있다. 중국은 집단지도체제지만 주석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덩샤오핑이나 장쩌민이 그랬다. 독일 통일에 고르바초프가 역할을 했듯이 한반도 통일에 시 주석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한반도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통일 한국은 다가오고 있으며 통일 한국이 중국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인식이 시 주석의 뇌리에 자리 잡는다면 이는 역사발전에 긍정적인 것이 될 것이다.

 지난 날 정상회담은 박근혜-시진핑 체제의 시작이었다. 두 지도자는 비슷한 인생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두 사람은 권력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2년에 태어난 박근혜는 아홉 살에 권력자의 딸이 됐고 그 위상은 18년 동안 지속했다.

 1953년 시 주석이 태어날 때 아버지 시중쉰은 공산당 실세였다. 시중쉰은 서북지방당· 정· 군 책임자였는데 베이징으로 차출돼서는 저우언라이 총리의 비서실장이 됐다. 시진핑이 귀족처럼 성장하던 50년대, 대약진운동의 부작용으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또래들이 굶을 때 시진핑은 입에 금 숟가락을 물고 있었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이 사치스러운 건 아니었다. 아버지 시중쉰은 항상 근검절약과 혁명 정신을 강조했다. 박근혜도 여유로웠을 뿐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도 검소했지만. 특히 어머니는 근검을 몸소 실천했다. 박근혜와 시진핑은 모두 비극적인 추락을 겪었다. 아버지가 피살된 후 박은 청와대를 나와 권력이 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은둔생활은 18년 동안 이어졌다. 시진핑이 아홉 살이던 때 아버지 시중쉰은 반당 분자라는 모함을 받아 연금됐다.

 13세가 되던 해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쳤다. 다니던 귀족학교는 해체됐고 시진핑은 서북지방 산골 마을로 하방(下放) 됐다. 박과 시는 똑같이 하락을 겪었지만 신고(辛苦)의 강도는 차이가 크다.

 아버지 정권에 대한 공격과 사람들의 배신으로 박근혜는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사회적인 위상과 경제적인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시는 철저하게 바닥까지 떨어졌다. 오지 마을에서 시는 주민과 똑같이 요동(窯洞)이라 불리는 동굴생활을 해야 했다.

 농사일은 중노동이었고 더 힘든 건 이와 벼룩이었다.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긁어대는 바람에 시의 피부는 피투성이였다. 시진핑은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쳤다.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시는 결국 하방을 택했다.

 오지로 돌아가 기층 민중으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마음 먹었다. 6년 만에 시는 지방 공산당 요원이 됐다. 180도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 것이다. (홍순도, 시진핑).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지도자는 시각이 실용적이며 종합적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북한 문제에서 시진핑은 핵뿐 아니라‘ 인민을 굶기는 실패 국가’ 라는 측면을 중시할 수 있다.

 중국통인 이세기 전 통일원 장관은 “시 주석은 전임자들보다 더 시장 친화적이고, 더 실용적이다.

  이게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미칠 것” 이라고 분석한다. 여러 면에서 중국은 변하고 있다. 북한 문제에서도 지도자들이 근원적이며 종합적인 처방을 고민하기 시작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 배고픔을 아는 시 주석이 이런 흐름을 주도한다면 이는 한반도 통일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박근혜와 시진핑은 시대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잘 엮이면 그들은 역사적인 과업을 해낼 수도 있다. 그것은 동북아 2,500만 인류를 비(非)문명에서 구해내는 대역사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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