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 마지막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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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년 마지막 달력
  • 허성배
  • 승인 2015.12.0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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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논설위원
다사다난했던 을미(乙未)년 마지막 달력을 펴는 손마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제 이해도 얼마 안 남았구나. 지난 1년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 왔는가. 
 
사람은 때로 건망증 덕택에 무수한 고난과 파란  속에서도 지난 일들을 거뜬히 잊고 살아간다고 하겠지만 12월만은 그렇지 못하다. 잊어버렸던 또 생각지 않고 살아오던 모든 일이 밀물처럼 한꺼번에 다시 생각나고 또 현실로 닥쳐오기 때문이다.  미루던 일들 부채(負債) 약속 모든 짐스러운 것들이 1년의 결산을 재촉하며 세금의 독촉 딱지처럼 마음 불안하게 밀려온다. 
 
더 핑계 대고 미루고 도망칠 수 없는 12월의 막다른 골목 안으로 쫓기면서 다시 한 번 삶을 생각하게 된다.  3백 65일의 풍성한 날들을 무위도식하며 허송세월한 초조함. 부끄러움이 쓴 약처럼 아프게 가슴속을 흘러내린다. 여름내 놀고먹은 농부가 겨울이 닥쳐 추수 없는 빈 곳간을 들여다보며 쓸쓸한 회한을 느끼듯이 인생의 추수 없는 사람들의 12월의 마음은 더없이 아프고 허전하다.
 
   시간은 걷기에서 달리기로 뛰어가듯 걷잡을 수 없이 흘러만 간다.  우리가 지금 이 글을 쓰고 또 읽고 있는 순간에도 시간은 찰칵찰칵 용서 없이 정지하지 않고 달아나고 있다. 시간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쫓기는 중죄인 것처럼 두려움을 느낀다. 시간을 바로 쓰지 못한 자책에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시간만은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한 번의 생명과 함께 떠나가고 있다.
 
   오래전 너무나 유명한 인도의 여 수상이었고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의 한 인간이 한순간에 재가 되어 “렌즈지” 강물 위에 뿌려지는 최후의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 강력했고 많은 활동과 화제를 남긴 사람이기에 세인의 가슴에 재처럼 쓸쓸한 여운을 남겼다. 삶과 죽음 사이를 한눈에 역력히 보여 주었다. 그러나 재가 되어 갠지스 강에 뿌려지는 사람은 한해에도 수십만이 되리라. 갠지스 강가에는 나이 먹고 병든 사람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모여 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죽음이 닥치면 살아있던 사람은 죽음의 장막을 헤치고 들어가 불에 태워지고 한 줌의 재로 남는다. 그리고 그 재는 저들의 고국을 지켜 흐르고 있는 거대한 강물에 뿌려지곤 한다. 파도소리와 바람 소리 들으며 그들의 혼백은 영원히 조국의 자연 속에 합류된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존재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권력도 명성도 부귀도 모두 다 한 줌의 재로 살아질 뿐이다.
 
   12월이 되기까지 우리는 살기 위해 앞뒤 돌아 볼 겨를 없이 달린다. 그러나 마지막 달력을 떼며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날마다 죽음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좀 더 뚜렷하고 의미 있는 삶을 생각하게 된다. 뜻이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세상에는 수많은 성인과 철학 서적이 있으나 역시 삶이란 이론이 아니라 생활이며 제각기 삶은 특유하기 때문에 자기 생의 의미는 스스로가 부여하고 창조해 나갈 수밖에 없다. 직업이나 라이프 스타일 생각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패턴속에 묶여 살아갈 수는 없다. 여기에 생의 슬기와 창조가 필요한 것이다.
 
   12월이 되어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나의 경우 뉘우침과 부채가 많기 때문이다. 보다 더 슬기롭게 보다 더 부지런히 많은 일을 하며 살지 못했다는 뉘우침(그것은 해마다 똑같은 뉘우침이지만)의 부채 인정의 부채등 많은 부담속에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연말이 무척 즐겁고 가슴 벅차기만 하던 젊은 날도 있었다. 
 
어머니가 마련해준 새옷들과 친척과 친구들의 만남 모두가 걱정없고 과욕없고 순진한 날의 넘치는 기쁨이었다.  “크리스마스” 캐롤를 들으며 거닐던 일 조그만 선물들을 정성껏 포장해 나누던 일 일년내내 소식없던 친구들까지 한 장의 카드에 한마디의 정겨운 말을 담아 주고 받던 일 모두가 부채나 의무가 아닌 소박한 인정이요 넘치는 기쁨의 날들이 었다.
 
  그러나 보다 더 잘살게 되고 번영한 사회생활 가정생활 속에서 연말의 행사도 모두가 벅차고 헛된 것이 되어 힘에 겨운 선물이 오가고 마음에도 없는 수식어로써 수백장씩의 인사장을 내야 하는 현대화된 연말은 우리들을 소박한 기쁨보다는 무거운 짐과 초조속으로 몰아 넣고 있다. 연말의 텔레비젼은 복잡한 우리들을 더욱 들뜨게 하고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날마다 또 시간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화려한 잔치 놀이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키고 도금칠해 주지만 텔레비젼을 끄고 나면 빈잔처럼 공허만이 남는다. 아픔이나 괴로운 일일망정 가득이 담겨 있는 것이 삶의 무게라고 생각한다. 고뇌나 회한이라도 좋다. 반추하며 생산하며 꿈꾸는 삶이 진정한 보람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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