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버린 ‘노불리스 오블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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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버린 ‘노불리스 오블리제’
  • 엄범희 기자
  • 승인 2009.06.1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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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제일 완주군 의회 의장 

‘노불리스 오블리제’, 유럽사회 상류층을 대변한 말로 1. 2차 세계 대전 당시 귀족층에서 앞장서서 목숨을 던져 조국의 위기를 구한 기사도 정신에 바탕을 두고 하는 얘기다.<7월 3일 취재>


기사도 정신은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덕목 가운데 하나다. 특히, 지도층의 솔선수범은 주민의 정신을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완주군의회는 2일 본회의장에서 의원 10명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제5대 후반기 의장단 선거를 실시해 신임 의장으로 임원규 의원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현 서제일 전반기 의장이 마음을 비워 후반기 의장 출마를 포기하고, 포기를 극구 반대하는 의원들을 설득하면서 일궈낸 ‘노불리스 오블리제’다. 전국 최초로 군의회 의장이 만장일치로 선출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은 완주군의회가 처음이다.

이날 선거에서는 각 상임위원장까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의리의 사나이’ 서제일 의장만이 일궈낸 아름다운 모습이 정치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서제일 완주군의회 의장은 7월 4일 전반기 의장 임무를 마치고 군의원으로 복귀한다.

▶80~90년대 평민당 시절, 무소속으로 정치에 입성
깃발만 꽂아도 당선됐던 80~90년대 평민당(황색바람)시절, 무소속으로 출마해 군의원에 당당히 입성했다.


당시 45표차로 이강식 의원을 제치고 2대 군의원에 당선된 서정일 완주군의회 의장은 4대 군의원(후반기 군의장)을 거처 5대 군의원(전반기 의장) 등 세 번째 지역주민들로부터 인정 받고 있다.

 
3대 의원선거 당시 ‘서제일이 한 게 뭐가 있느냐’며 주민들이 안생근(민주당)의원을 밀어줬지만 4대 때는 ‘그래도~’ 하면서 서 의장을 다시 선택했다. 시원시원한 해결사 서 의장은 5대군의원 선거에서는 오히려 주민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는 돈 선거를 치르지 않은 의원으로 유명하다. 초대 선거에서는 후보 등록, 홍보물 제작 등 1,300만원으로 선거를 치를 정도다. 무소속으로만 군의원에 입성한 것도 남다르다. 평민당, 민주당 당적 후보들도 서 의장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5대에서도 무소속으로 당선했지만, 당선과 동시에 통합민주당에 입당했다.

▶언제나 든든한 형제들
그는 형제들을 가장 중시한다. 형제들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때 마다 온집안 식구이 발벗고 나섰다. 교장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큰형님(서기순)이 주축을 이뤘다. 집안 식구들이 만들어낸 값진 승리들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현재는 모든 집안 형제들의 화합과 단결, 그리고 리더 역을 서세일 전북도체육회 부회장(둘째형)이 대신하고 있다. 전북수영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서정일 회장(셋째형) 역시 지역주민들로부터 존경받는 형님이 있다. 넷째 형은 서울에서 신광양산을 운영(서평일 대표)하면서 든든한 후원자다.


월드컵 골프장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동일 회장은 서 의장이 가장 자주 만나는 동생이다. 지역의 복잡한 문제 등 주로 많이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서경일 완주군 검도협회 회장겸 완주중 운영위원장은 지역봉사활동으로 믿음직한 막내다.

 봉동초등학교에 버스도 기증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남모르는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형만 한 아우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선지 언제나 형님들의 말없는 도움을 잊지 못한다.

▶4개월동안 4대 군의장 시절
4대 군의원 시절, 전(前) 의장(소병래)이 도의회로 진출하기 위해 사표를 던지면서 부의장이 의장직을 승계했다.


그는 의회에서 해결사였다. 집행부와 의회간 강등은 물론 의원들간 불협화음을 풀어내는 가교역할을 했다. 주변에서는 실질적인 의장이나 다름없다는 얘기가 무성할 정도였다. 의원들도 서 의장과 함께 하면 든든하게 여겼다.


그는 호남고속도로에서 함양간 고속도로(현재 삼례도로)를 놓을 당시, ‘봉실산 혈이 끊어지면 10년간 재앙이 온다’는 어느 노인의 말을 듣고 삼례 쪽으로 도로를 변경했다. 현재 삼례 봉동읍 구만리 건전마을에 완주톨게이트가 만들어진 것도 그의 숨은 노력이 작용했다.


그러다보니 벽성대학 분교도 구미공단까지 겨냥할 수 있다고 설득해 이곳에 유치하게 됐다. 금산 대전간 산업도로도 봉동을 피해 건설됐다. 당시, 전북도에도 국토관리청에도 계획을 찾을수 없었다. 건설교통부에 10년계획으로 금산 대전간 산업도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현재 용진을 거쳐 고산을 가로지르는 산업도로다. 지가가 떨어지는 등 봉동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 두 가지를 자부한다. 의정보고를 하지 않다보니 주민들이 모르고 있다. 공치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에 자랑하고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5대 전반기 군의장 시절
그는 뚝심있는 정치인이다. 5대 전반기 시작과 동시에 군의원들과 함께 읍면사무실을 돌면서 각읍면 기관장, 직원들과 등과 간담회를 가졌다. 간담회 자리에서 공무원의 애로사항, 지역현안사업, 숙원사업 등을 청취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앞으로 완주군 의원들은 누구도 지역개발사업에 간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지역개발사업건으로 의원과 면장간 갈등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결국, 읍면장들의 권한을 강화시켜준 셈이다.


2006년 강원도 홍수피해 당시, 그는 전국 최초로 봉사활동에 나섯다. 완주군 의원을 비롯해 의회 직원들이 2박 3일동안 피해복구, 가재도구 등 구슬땀을 흘렸다. 농업경영인들의 선심성 해외여행 차단도 그의 몫이다.


집행부가 군민의 혈세로 특정단체(농업경영인-과거 선거에서 군수에게 도움을 준 단체)에게 해외여행을 보내주는 것은 모순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상관면 상관중에서 열린 농업경영인 대회에서 FTA. 우르과이 협상 등 농민들이 시름하고 있는데 먼저 완주군의원들이 여행경비를 반납할 테니 특정단체의 여행도 반납할 것을 요구했다.

서제일 의장은 형제들을 가장 중시한다. 형제들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군의원들이 ‘왜 독선하느냐’ 며 반발해 질타도 받고 탄핵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군의회 리모델링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말도 많고 탈은 의회 리모델링은 배짱으로 끝까지 관철했다. 상임위원장실, 전문위원실 등이 의회와 떨어져 있다 보니 시시각각으로 필요한 대화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군의회 직원 정원도 15명에서 21명으로 6명 증원했다. 그만이 가능했던 일들이다. 그는 콩깍지 하나라도 나눠먹는 인정있는 사람이다. 7,000만원의 예산이 책정된 관용승용차도 반납할 정도로 검소하기도 하다. 업무공통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자신의 차를 직접 타고 다니는 경우가 허다한 것도 그가 군의장으로서 기억에 남을 일이다. 급히 행사장에 갈 경우에만 의전용차를 이용했다.


2년동안 욕심없이 군의장을 하면서 의원들 뒷바라지만 하다보니 많이 힌머리가 보였고 주름도 늘었다. 뜻하지 않은 빚도 불어났다. 그는 의원들에게 그렇게 싫은 소리를 많이 해도 누구하나 반박하지 않는다. 그만큼 떳떳하기 때문이다.


그는 “의원뺏지(당선)를 달았다고 의원이 아니다”면서 “의원의 자격증은 4년동안 의정활동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의원 자질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공부했느냐에 따라 비로소 자격증을 받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의원이라는 자부심에 앞서 그만큼 노력하고 공부해 지역주민들을 위해 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강한자에겐 강해도 약한자에겐 약한 사람
강한 자에게는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한 것이 서의장의 기질이다. 그러다보니 약한자들과 함께 눈물도 흘려보고 같이 뜨거운 정을 나누기도 했다. 주변에선 그를 팔방미인이라고 말한다. 의리와 정이 많다보니 손해도 많지만 존경하고 좋아하고 있다.

그는 공무원이 불이익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의회의 수장이라면 공무원을 감시하는 것이 주 임무겠지만 “주민 요구사항을 들어주기 위해 법을 어기면서까지 어떻게 감시할 수 있겠느냐”며 대통령 할아버지도 안될 것은 안된다고 그 자리에서 지적한다. 소외된 공무원들을 찾아내 도와주는 일도 그가 해야 할 일거리가 됐다.

그러다보니 공무원들도 그를 따른다. 상은 야무지고 카리스마가 넘쳐 보이지만 서의장을 막상 만나고 난 뒤에는 허물이 사라진다. 그는 공무원편에선 주민을 설득하고, 주민편에선 공무원을 설득해 도와주는 평화주의자다.


대학을 다니다 데모에 가담해 졸업장을 얻지 못한 서의장은 현재 예원대 체육학과 대학원 3학기 재학중이다. 나이먹고 배우다보면 졸리기도 하겠지만 그는 요즘 노래 공목만도 20개 넘게 기억하고 다닌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 공부다. 예원대 총동창회장도 그가 맡고 있다.


그는 노인대학, 주부대학,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자주 강의를 하고 다닌다. ‘내로라’하는 교수가 하는 강의보다 더 실감나는 윗트와 가슴에 와 닿는 얘기로 수강생들에게 인기만점이다. 즉흥적인 축사도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지난 ‘여성의 날’에는 과거 대한민국 1부1처제 시절 , 남자가 여자를 학대했던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여성상위시대를 강조할 땐 여성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서제일 의장은 “의원들은 당선되면 주민들의 대변자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과거의 의식을 바꿔야 한다”면서 “의정활동을 할 수 있도록 주민들이 도와주고 감싸줘야 지역 발전이 가속화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는 군의원, 도의원, 국회의원이든 당과 학연, 혈연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의원들도 자질을 높이기 위해 배우고 노력하는 자세, 권위의식을 떠나 항상 낮추는 자세가 결국 존경받는 의원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독교 가족으로 봉산교회 집사인 서 의장은 임은자 여사(56)와의 사이에 양희 (30·너싱홈 요양원 근무), 승민(29·우석대 교육대학원 재학 중) 1남 1녀를 두고 있다./엄범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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