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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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의 발자취
  • 투데이안
  • 승인 2009.06.1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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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 살아오는 역사의 불길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농민봉기를 시발점으로 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최초로 민중의 자각에 의한 전국적 농민항쟁으로서 근대사회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1차 농민항쟁은 자유민권을 위한 반봉건 항쟁이었으며, 2차 농민항쟁은 일본침략군을 이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민족자존의 반외세항쟁이었다.
지배, 예속 관계에 기초한 봉건적 사회 경제체제를 무너뜨리고 평등, 자유, 자치의 원칙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경제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한 동학 농민혁명은 결국 보수 양반계층의 연합세력, 그리고 이들이 끌어들인 외세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맥은 이후 활빈당 운동, 영학당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항일 의병항쟁 및 3.1운동 등의 원동력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동학혁명의 발자취

1) 배경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 3대 60년간에 걸친 나이어린 아들이 즉위하자 안동김씨, 풍양조씨로 이어지는 세도정치(외척 세력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비 정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중앙정치 기강의 문란을 가져왔다. 중앙정치의 문란은 탐관오리의 특세를 가져왔으며 그로 인하여 사회는 동요도고 삼정의 문란을 초래 하였다. 삼정이란 봉건적 수취 체제의 기본이 되는 전정(토지세), 군정(16-60세에 해당하는 성인 남자들이 군대에 안가는 대신 내는 세금), 환곡(춘궁기 때 관곡을 빌려주고 추수때 갚도록 한 제도)을 말하는데 이것이 지방관들이 농간으로 수탈의 수단으로 변하여 농촌 사회의 파탄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이래의 지주제의 확대 발전과 농법의 발달은 농촌 사회의 계층을 변화 시켰으며 봉건적 수취체제는 군현 단위로 세금을 징수하는 총액제의 원리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양반 토호들은 빠져버리고 그 몫까지 농민들이 부담하게 되었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 거지떼가 되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고 이로 인한 민중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으며이러한 봉건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 하려는 주인 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안으로는 조선사회 내부의 모순이 표출되고 밖으로는 자본주의를 앞세운 서양 열강의 침략이 노골화 되어 봉건사회의 낡은 틀을 무너 뜨리며 새로운 사회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전환기 였다.특히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의 청,일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으로 인해 조선 에서의 주도권은 청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 에서의 정치적 열세를 만회 하고자 경제적 침략에 주력하게 되어 조선은 일본의 식량 공급지가 되어 버렸다. 값싼 생필품을 미끼로 한 일본의 쌀 수입이 늘어나게 되자 국내 쌀값은 폭등하게 되어 조선 민중은 물가고와 식량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에서도 정부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거둬 민중을 수탈 하였으며 관직을 직접 매매하는 매관매직도 여전히 성행 하였다. 돈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은 그 동안 들인 비용을 충당하고 더욱 축재 하기위해 각종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민중을 수탁하는 방법도 다양해 졌다.
이러한 봉건적인 사회, 경제관계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봉건통치 계급의 횡포한 착취와 외세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한 민중이 저항의식 으로 발전 되어갔다. 이와같이 봉건체제의 모순이 기퍼가는 가운데 1962년 이후 삼남의 70여 고을에서 농민봉기 가 발생하여 1992년경에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농민 항쟁의 조직과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동학 이었다
동학은 경주 출신의 몰락양반 최제우가 자본주의 열강이 점차 침략의 야욕을 뻗쳐오던 1960년 서학(천주교) 에 대립하여 창시한 민족 종교였다. 동학사상의 핵심 내용은 "사람이 곧 하늘" 이라는 한마디로 요할수 있다. 당시 봉건 지배 계급은 민족을 오로지 수탈의 대상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동학은 이에 대응하여 평등사상 를 제시 하였다.
이는 봉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때 유교적 기존질서를 뒤흔드는 불온 사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 민중의 계층의 요구를 반영한 이념 이었기에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갔다. 그런데 이러한 동학 사상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외세 침략과 봉건 체제의 모진 굴레 속에서 "보국안민" 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론이 결여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민중의 실천속 에서 극복 되어졌다.

2)교조신원 에서 척왜 양창의로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1964년 봉건정부에 체포되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흘리는 망령된 설을 퍼뜨렸으며 평상시에 난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무리를 모았다" 는 죄명을 대구장대 에서 처형당하였다. 물론 동학은 일체 금지되어 탄압을 받았고 이를 빌미로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탄압 에도 불구하고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교세가 더욱 확장하게 되자 동학의 합법성을 요구한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교조 신원 운동이다.

[1] 삼례집회
1892년 10월 공주 집회가 별 소득없이 해산되자 1892년 11월 3일 전라도 삼례에 수천명의 민중이 모여 10여일 간 집회가 계속되었다. 이에 전라감사 이경직의 "동학의 인정여부는 권한 밖이며 동학을 빌미로 한 관 할 지방수령들의 수탈을 금하겠다." 는 답신을 받고 집회를 해산 하였다.

[2] 한양의 복합상소와 척왜양 운동
1892년 12월초 민중의 재집회 요구에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 수천명이 모여 들었다. 이에 당황한 동학의 북접 상층부는 하층 농민 대중의 집단력을 피하고 소수인의 대표에 의한 상소의 방법을 제시하여 1893년 2월 8일 40 여명의 대표단이 광화문 앞에서 3일 밤낮으로 엎드려 상소 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 너희들은 각각 집에 돌아가 생업에 힘쓰고 있어라, 그러면 이에 소원에 따라 시행 하리라- 는 답신을 내렸다. 이에 북접계 쪽에서는 복합 상소를 중지하고 곧장 해산해 버렸다.

[2] 한양의 복합상소와 척왜양 운동
1892년 12월 초 민중의 재집회 요구에 충청도 보은장내리에 수천명이 모여들었다. 이에 당황한 동학의 북접상층부는 하층농민 대중의 집단력을 피하고 소수인의 대표에 의한 상소의 방법을 제시하여 1893년 2월 8일40여명의 대표단이 광화문 앞에서
3일밤낮으로 엎드려 상소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너희들은 각각 집에 돌아가 생업에 힘쓰고 있어라, 그러면 이에 소원에 따라 시행하리라." 는 답신을 내렸다. 이에 북접계 쪽에서서는 복합소소를 중지하고 곧장 해산해 버렸다. 한편 복합상소사 진행되고 있을때 이미 한양에서는 남접계 농민들이 상경하여 외국 공사관 및 교회에 강경 한 내용으로 외세배격의 벽보를 붙이고 다녔다.

[3] 보은과 원평집회
1893년 3월 11일 전라경상충청경기 강원등 각지에서 끝도없이 군중의 대열이 충청도 보은으로 몰려들었다.
수만명이 모인 이 집회에서는 '척왜양창의"라는 외세배격의 덩치적 구호가 등장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어윤중을 양호선무사로 임명하여 토벌토록 하였다. 어윤중은 4월 1일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계지도부와 만나 해산을 종용하는 고종의 말을 전하였고 이에 북접계 지도부는 감격하여 해산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북접계 지도부의 투항적 태도는 농민대중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최시형 손병희 등은 그 날 밤을 틈타 빠져나가 버리게 되었다. 보은 집회가 이렇게 진행되어 갈때 전라도 원평에서는 전봉준등이 주도한 원평집회가 뜨거운 열기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보은집회가 흐지부지 해산하게 되자 운동의 강력하 구심점을 원평집회에 두면서 보은집회의 열기를 끌어모아 한양으로 진격하고자 했던 계획이 무산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3)사발통문 거사계획

고부지경은 호남제일의 쌀 생산지이며 농산물 집결지였다. 뿐만아니라 서해안을 끼고 있어 해산물 또한 풍부하였다.그런만큼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봉건적 수탈과 일제의 경제적 침략이 극심한 곳이었다. 이러한 때부패한 봉건 정부의 하수인인 고부군수 조병갑은 당시 전국적으로 행해지던 삼정의 문란을 이용한 수탈외에도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수탈을 일삼았다.
그 한가지로 만석보 축조를 빌미로 수세를 받아왔다. 마침 1893년 극심한 흉년이 들어 그해 11월 40 여명이 농민들이 고부관아로 몰려가 만석보의 수세 감면을 진정 하였으나 조병갑은 오히려 양민을 선동하는 난민이라 하여 그 가운데 대표자 몇 사람을 구금하였다. 이로 인하여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지고 전봉준 등 20여명은 송두호의 집(고부 신중리 죽산마을)에 모여 고부군수 조병갑 외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전주성을 함락한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거사 계획을 결의하였다.(사발통문 거사계획) 그러나 이는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11월 30일 고부 농민들이 1차 공격 목표인 조병갑 이 익산군수로 전임 발령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후 5명의 인물이 고부군수로 발령이 났으나 조병갑의 치열한 재취임 공작에 밀려 부임하지 못하게 되자 급기야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취임하게 되어 결 국 고부농민 봉기를 자초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4) 고부에서 혁명의 불꽃이

1894년 1월 10일 밤 배들평야(이평)주변의 10여부락의 농악대에 이끌려 농민들이 예동마을 (말목장터)에 모여들었다. 이날 밤 일장 연설을 마친 전봉준은 모인 농민들을 두패로 나누어 고부관아를 향해 진격하였다. 농민들은 인근 대밭에서 죽창을 만들어 쥐고 1월 11일 새벽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때 조병갑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수천의 분노한 농민들은 옥을 부소고 무고한 양민을 석방 하였으며 창고문을 열어 강탈당했던 곡식을 인든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원한의 대상인 만석보를 허물어 버리고 말목장터에 진을 치는한편 백산에 토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즈음 새로 부임해온 군수 박원명은 적극적인 회우책을 세우고 폐단의 시정을 약속하며 해산을 권유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함열조창을 점령코자 하였으나 조병갑 타도에 뜻을 이룬 농민들은 더 이상의 사태 진전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부득불 해산을 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서야 안핵사 이용태는 역졸 800여명을 이끌고 고부로 들어와 모든 책임은 동학도에 있다하여 무고한 농민들까지 마구 잡아 가두고 학살하며 재물 약탈에 혈안이 되었다. 농민들이 원성은 하늘을 찌를듯 하였고 무장으로 간 전봉준은 당시 동학 조직의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손화중을 설득하여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5)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1894년 3월 21일(25일 설도 있음) 정읍 고창 무장 태인 금구 김제 부안 영광 등지에서 몰려든 농민들은 고부의 백산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손화중 김개남을 부대장격인 총령관으로 추대하고 오시영 최경선 등을 영졸장으로 하였다. 전봉준 등은 총 사령부로서 백산에 호남창의 대장소를 두고 각지에 창의문과 격문을 발하여 민중의 총권기를 호소하였다. 아울러 농민군의 행동강령을 발표하였다.
그내용은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백성의 가축을 행하지 않는다.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건지고 백성 을 편한케 한다.
세째, 일본놈을 쫓아내고 성인의 도를 깨끗이 한다.
네째, 서울로 진격하여 나라를 망치는간신배를 처단한다.
는 4개항으로 반봉건, 반외세의 목표를 명확히 하였다.


6) 황토재에서 첫승리의 함성

이에 정부에서는 4월 2일 홍계훈을 양호 초토사로 임명하여 중아군을 파견기로 하고 이보다 앞서 전라 감영에서는 감영군과 보부상으로 구성된 2.400 여명의 연합 부대를 4월 3일 백산으로 출동시켰다. 4월 7일 황토재에서 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정읍을 점령하고 4월 8일 흥덕과 고창을 4월 9일에는 무장을 점령하였다. 4월12일 영광을 점령한 후 함평 나주를 거쳐 장성으로 향했다.


7) 장성에서 경군 격파 ----- 전주입성

4월 7일 전라감영군이 대패한 날 홍계훈이 이끈 경군이 군산에 들어와 전주에 도착하였다. 사기가 저하된 홍계훈은 조정에 증원군을 요청한 후 4월 27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초토사 홍계훈은 뒤를 쫓아 완산에 진을치고 수차례 공방전을 전개하는 동시에 조정에 외세를 끌여들여 진압하자는 내용의 보고문을 보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청에 원병을 요청하여 5월 5일 청군이 상륙하였으며 일본군이 첱진 조약가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5월 7일 인천항에 상륙하게 되었다. 동족을 처단하기 위해 외세를 끌여들여 이제 조선은 청.일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민족적 위기에 접한 농민군은 5월 8일 정부가 요청한 휴전 제의에 각종 폐단을 시정하는 내용의 개혁 안을 제시한 후 수락의 뜻을 밝히자 군군과 화약을 맺고 농민군들은 전라도 일대에 농민군 자치기구 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군이 주체가 되어 지방자치를 하였다.


8) 척왜의 깃발아래 다시 서는 농민군

전주화약이 성립되자 정부는 청일 양국에 동시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서양제국주의 열가의 지지를 받기위한 외교적 노력에 주력하면서 일본군의 계속 주둔과 청국과의 전쟁구실을 만들기에 힘섰다. 마침내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침입하여 고종을 연금시키고 친일정권을 수립케 한 후 아산만에 저북해 있던 청국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봉준 등이 그토록 우려했던 청일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의 강토는 외적들의 싸움장이 되고 말았다. 집강소 활동에 매진하면서도 정국을 주시하고 있던 전봉준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고자 9월 14일 전라도 삼례에서 재차 일어섰다. 이제껏 동학이라는 조직의 안전에만 중점을 두고 관망을 했던 북접도 논산에서호응하여 합세하였다.


9) 통한의 우금치고개

10월 16일 논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이인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고 공주를 향하여 북상하였다. 그러나 이미 일본군과 관군은 공주영의 요처에 병력을 배치하여 농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8일 공주로 진격하여 우금치 고개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근대적 무기에 맞서 농민군은 4-50여 차례 공방전을 펼쳤으나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끝내 참패하고 말았다. 공주전투에서 패한 농민군들은 논산 금구 태인 등 각지에서 일본과 완강히 싸웠으나 또 다시 패하였다. 공주패전 이후 농민군들은 일본군의 가혹한 토벌전에 의해 삼남 일대에서 약 30만명 이상이 학살 당하였다. 전봉준등은 재기를 노리며 순창 쌍치 피노리를 들렀다가 변절사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30일 손화중, 최경천, 김덕명, 성두환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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