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배/논설위원
지금까지 드러난 국정농단사태로 가장 큰 피해자는 대기업 총수들이다.
국조특위인 국회가 6일부터 9개의 기업총수를 일제히 불려 죄인 취급을 하며 속담에 돈 내고 뺨맞는 후진적 관행으로 2중, 3중의 고초를 받고 있는데 이같은 행위는 기업운영에 큰 타격을 줄 뿐만 아니라 국가경제 위기와 글로벌 기업 이미지 추락 등 “코리아 디스카운트”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정치의 위기에도 국가가 굴러가는 건 경제 토대가 튼실할 때만이 가능하다. 그게 선진사회로 가는 진정한 힘이다. 권력으로 민간기업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한, 외환위기라는 먹구름은 발등의 불처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3일은 6·25 이후 최대 국난 또는 ‘제2 경술국치’로 불린 ‘환란(換亂)일’이다. 19년 전인 1997년 이날 당시 임창열 경제 부총리,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자금지원안, 즉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해 1월 시작된 한보그룹 계열사 22개의 연쇄 부도와 거래 은행·종금사 등 61개 금융기관의 부실화가 전조(前兆)였으나 누구도 민간의 위기가 정부의 위기로 확대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 신호들이 로버트 루빈 미 재무부 장관을 움직였다. 뉴욕 월가와 유럽의 주요 재무장관들에게 한국에서 자금 인출을 자제하고 만기를 연장해주도록 요청했다. 크리스마스이브 12월 24일, 단기외채의 ‘코리아 대탈출’이 멈췄다. 김대중정부 초대 경제사령탑이었던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최근 출간된 ‘외환위기의 파도를 넘어서’에서 “리더십에 대한 신뢰가 국제사회의 협조를 끌어낸 것”이라고 했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단기적으론 통계 착시 현상, 시장의 불확실성에 대한 정부의 졸속 대응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게 국가의 신인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을 안이하게 생각했다. 신용등급은 나쁘지 않았다. 연평균 8%의 고도성장이 지속했고, 물가도 안정 추세였다.
작금의 한국경제가 ‘더 큰 위기’라고 한다면 반박할 정신 나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역대 최상의 국가 신용등급에다 세계 7위(3,751억 달러)의 외화보유액을 유지하고 잊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1997년과 달리 세계 경제가 장기정체 상태다. 한국도 2012년 이후 2014년(3.3%)을 제외한 나머지 3년간 모두 2%대 성장에 그쳤다. 올해엔 최악 인데다. 내년에는 더 어렵다는 전망이 크다. 경제 규모를 지속 성장시킬 경제 체질을 바꾸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일시적 위기보다 장기 저성장의 ‘침체 공포’가 더 무섭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청와대나 정치권은 경제에 대해선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경제 지휘소 공백이 이어지는 데도 내팽개치고 이제는 검찰까지 반(反)기업 때리기와 입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세계 200여 개국에서 사활을 건 경쟁을 하는데, 국내에서는 마치 ‘범죄 기업’처럼 취급하면 세계 경쟁력은 자해(自害)수준을 넘어설 것이다. 국정 농단의 본질은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사적(私的)기업 갈취다. 그런데 대통령 조사 대신 만만한 기업을 향해 화풀이하듯 압박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기업이 거덜 나면 국가 경제가 휘청거리고 나라 재정이 고갈되면 제2의 IMF보다 더욱 크고 혹독한 글로벌 쇠락 국가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정(政)·검(檢)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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