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신용개(申用漑)가 오른 전주 쾌심정(快心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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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의정 신용개(申用漑)가 오른 전주 쾌심정(快心亭)
  • 신인식
  • 승인 2017.04.27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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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식 진안무주장수 본부장

전주를 두고 “나라의 조상이 일어난 곳이요, 일도의 으뜸이다”라고 했던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세종 21)∼1488(성종 19)도 조선(朝鮮) 이 태조(李太祖)의 고향인 패향(沛鄕)에 대한 십영(十詠) 중 쾌심정(快心亭)에서 풍치를 읊었다.
단청 화려한 정자가 푸른 산 마주했는데

푸른 대나무 숲 돌아서 깊숙히 들어가네
어느 때나 어진 부윤과 술자리를 열어서
평소 울적한 마음을 유쾌히 다 풀어볼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3 전주부(全州府)에 “쾌심정(快心亭) 제남정(濟南亭)으로부터 4리 떨어져 있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면 산이 끊어지고 물이 돌아 내려가는 낭떠러지가 있는데, 돌을 쌓아 터를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라고 적고 있다.
좌의정 신용개(申用漑·1463∼1519)도 오르고 시를 읊었다. 달뜨는 밤이면 국화화분 사이에 술상을 놓고 국화와 더불어 주거니 받거니 취하도록 마셨다고 전하고 있다.
푸른 산이 우뚝 끊어진 모퉁이로 병풍처럼 푸른 물이 둘렀는데,
누가 좋은 정자를 물가에 지었는가.
잔잔한 물결에 바람이 없어 거울처럼 비치고,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로 해가 지니 붉게 흙더미를 이루었네.
찬 하늘이 떨리니 가을이 장차 저무는데,
멀리 떠난 나그네가 등림(登臨)하여 머리를 홀로 돌리네.
또한 젓대 소리가 나를 흥기시키니,
맑은 시가 기루재(倚樓才 시를 빨리 쓰는 재주)를 빌릴 필요가 없네.
신용개의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개지(漑之)이며, 호는 이요정(二樂亭). 수옹(睡雍). 송계(松溪). 대제학 신장(申檣)의 증손이고, 영의정 숙주(叔舟)의 손자로, 관찰사 면(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우군사용(右軍司勇) 정호(丁湖)의 딸이며,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에 사마시 에 합격하고, 148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그해에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그 뒤에 수찬·교리를 역임, 149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직제학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502년 왕을 기피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 영광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으로 서용되었으며, 이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 이듬해 성희안(成希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名)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 뒤 대제학·우참찬과 대사헌을 거쳐서 이조·병조·예조의 판서를 역임, 우찬성이 되었다. 1516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518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임금이 모든 것에서 모범을 보임으로서 벼슬아치들과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다고 보았다. 신용개는 대학을 인용하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논리에 기초하여 자신의 덕을 닦는 것을 국가 통치에서 군주가 가장 먼저 그리고 근본적으로 힘써야 할 항목으로 제시하였다.
“무릇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아홉 가지 근본 강령이 있으니, 자신을 수양하는 것, 현인을 높이는 것, 친족을 친애하는 것, 대신을 공경하는 것, 여러 신하들을 자기 몸과 하나로 생각하는 것, 서민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 모든 기술자들이 모여들게 하는 것, 변방의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 제후들을 포용하는 것 등이다.(凡爲天下國家, 有九經曰, 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敬大臣也, 體群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懷諸候也.)”
중용에서 ‘구경(九經)’의 논리를 원용하여 그는 국가 경영에서 군주의 수신을 가장 선차적이고 기본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덕과 법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서 덕을 근본적인 것으로 앞세우면서도 적절한 인재의 등용을 중요하게 보았다. 그리고 맹자를 인용해서는 ‘군주의 선한 마음이나 법만 가지고는 국가 운영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으며 오직 군주가 위에서 덕으로 이끌고 아래로는 시의에 적절하게 법의 수정하고 동시에 현명하고 능력있는 인재로 하여금 군왕의 국가 통치를 보좌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덕치와 인정을 근간으로 하는 유학의 정치 이념에 기초하면서도 법제의 중요성을 부차적인 것으로서나마 나름대로 인정하였다. 그는 ‘구경(九經)’을 정치에서 우선적으로 중시해야 할 아홉 가지 지침으로 해석했다.
그는 기품이 높고 총명하여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고,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하였다. 인품 또한 꿋꿋하여 범하지 못할 점이 있어 당시 선비들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성종은 그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御衣)를 벗어서 입혀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이요정집》이 있고, 편서로는 《속동문선》·《속삼강행실도》가 있다. 그의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3 전주부(全州府)에 “쾌심정(快心亭) 제남정(濟南亭)으로부터 4리 떨어져 있다』라고 되어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그 곳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이 다시 조명되어야 하고 그가 제시한 지도자의 덕목을 오늘에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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