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배/논설위원
녹음이 우거지는 계절이 왔다.
피곤한 일과에서 잠시 마음 놓고 창문을 열며 바람결에 희미하게 또는 선명하게 때로 가까워지는 듯 더러 멀어져가는 듯 “소쩍 소쩍…”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리곤 한다. 모악산 소쩍새 울음은 밤에 들어야 정한에 잠 못 드는 이의 혓소리를 대신 풀어낸다지만 낮에 듣는 소쩍새 울음도 꽤 이상적이다.
울다가 울음이 진하면 피를 토하면서까지 울고 마침내는 피가 다하여 죽고 만다는 소쩍새는 고려의 가요 정과정곡(鄭瓜亭曲)에서도 슬프게 노래가 되어 있다.
『내 님을 그리 자와 우니 나니, 산 소쩍새와 비슷하오이다. 아니시면 거츠르신 달아 아, 잔월효성(殘月曉星)이 아시리이다…』라고 고려 적의 이름모를 작가는 새벽하늘의 조각달과 잔별 떼까지도 다 알고 있는 결백함을 왜 몰라 주냐고 소쩍새처럼 피를 토하며 울었다고 한다.
소월도 『접동 애오라지 접종…의 의붓어미 시샘에 죽은 누나는, 진두 강 사람 가에 와서 웁니다. 아홉이나 남게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소쩍새 되어 운다고 노래했으니 진정 소쩍새 울음은 살아생전에 못다한 사랑이나 억울한 누명을 죽어서까지 울어대는 넋의 소리를 연상시키는가 보다.
윤희 설(輪廻說)의 말대로 한 많은 이의 넋이 소쩍새로 환생 되어 슬피 우는 것인지 듣는 이의 마음이 설움에 겨워 처절(悽絶)하게 들리는지 아니면 비록 미물인 새라 하더라도 모든 목숨이 지닐 수 있는 아픈 사연을 간직한 까닭에 또한 그렇게 우는지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한참 푸르러 가는 녹음 속에 그 모습을 숨기고 목청 하나로 자신을 들어내는 소쩍새 울음은 어쩐지 자학처럼 가슴에 와닿는다.
현대인을 고독한 군중으로 표현한 “에리히 프롬”의 소외의식이 새삼 절실하게 느껴지는 듯도 하다.
팔순이 가까워진 이 나이에 그것도 눈부시도록 볕 바른 대낮 풍요와 삶의 환희(歡喜)를 상징하는 짙푸른 녹음의 계절에 어째서 목 놓아 우는 소쩍새의 고적감에 이리도 공감이 되는지!
외쳐 볼 목청이 없고 소리쳐도 귀 기울여 주는 이 없는 고독한 영혼이 못다 부른 노래처럼 아리고 아프게 들리느냐 말이다.
모악산 푸르디 푸른 기슭에 숨어 우는 소쩍새여 “말하라 그대 정녕 누구였길래 그대 진정 무엇이 아파 그토록 슬피 우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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