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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지침이 된 『해동제국기』
신인식 진안무주장수 본부장
2018년 01월 15일 (월) 17:37:50 신인식 .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는 외국 여행이 자유로 왔지만,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가 시작 되면서 쇄국정책이 시행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유학생들이 자유롭게 중국을 유학하였는데,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했던 것을 보면 12세에 이미 중국어도 상당 수준 습득하였으므로 혼자서 조기 유학길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당나라 곳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충선왕이 북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설치하고 고려학자들을 초청하여 원나라 학자들과 자유롭게 토론하게 하였다. 중국어회화 교재인 노걸대(老乞大)는 개성의 무역상이 북경까지 가면서 곳곳에서 필요한 회화를 습득케 하는 형식인데, 북경에 거주하는 고려인 동네와 가게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과 명나라가 서로 쇄국적인 정책을 시행하여, 조선에 중국인이 살 수 없었다. 중국어 회화를 조선인 역관에게서 종이책으로 배워야 했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도 중국인 학자 황찬(黃瓚)의 자문을 받기 위해 신숙주가 요동에 13회나 다녀와야 했다. 황찬은 신숙주의 학자적인 태도에 감복하여 희현당(希賢堂)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그 의미를 설명하는 글까지 썼다.
쇄국주의 시대일수록 해외문견록(海外見聞錄)이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당시는 공식적인 사신만이 외국에 나갈 수 있었으므로, 사신으로 방문하는 기회에 해외문견록을 기록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오백년 동안 1,000회가 넘는 사신을 중국에 파견했고 100회가 넘는 사신을 일본에 파견했지만, 두고두고 읽을 만한 해외문견록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외문견록으로는 삼국시대에 혜초(慧超)가 기록한 왕오천추국전(往五天竺國傳), 조선전기에 신숙주가 기록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조선후기에 박지원이 기록한 열하일기(熱河日記), 대한제국시대에 유길준이 기록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꼽을 수 있다. 연세대 허경진박사는 해동제국기, 열하일기, 서유견문을 모두 번역했는데, 후대에 가장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 해외 견문록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라고 한다. 일본에 통신사가 파견되던 1607년(1차)부터 1811년(12차)까지 사행원들이 손에 해동제국기를 들고 다니며 참고하였고, 일본인들도 여전히 신숙주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왕오천축국전이나 열하일기는 필사본으로만 전해졌지만, 해동제국기만은 조선시대에 이미 금속 활자본으로 간행된 것도 국가차원의 중요성 때문이다 고 주장했다.
통신사는 조선후기에 조선 국왕이 에도막부의 장군에게 12차 보낸 사절을 가리키며, 흔히 조선 통신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통신사는 고려시대인1375년에 처음 사용했으며, 조선 조정에서 조선 통신사를 파견한 적은 없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하면 일본에서 조선통신사가 왔다고 기록했을 뿐이다.
고려 시대에 일본에 파견된 사신 가운데 명칭이 확실한 경우는 통신사(通信使 羅興儒)와 보빙사(報聘使 鄭夢周)뿐인데 고려사에 실린 통신(通信)의 의미는 “소식을 전한다.″ 는 뜻이다. 그나마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던 나흥유는 옥에 갇혔다가 간신히 돌아왔다. 이 시기의 통신사라는 명칭에 조선후기 같은 선린(善隣)의 의미는 없었다.
조선 초에 파견한 사절은 대부분 구주절도사나 대마도주에게 파견한 사절이었고, 그 명칭도 일본회례사(日本回禮使)였다. 1398년에 박돈지(朴惇之)를 통신관으로 파견한 것은 아직 통신사를 파견할 상황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태종 때 네 차례 파견된 사신 가운데 박분(朴賁)의 경우에 통신사, 또는 통신관이라는 명칭을 섞어 사용했는데, 안전이 보장되지 않아 중도에 돌아왔다. 1424년에 파견한 회례사 박안신(朴安信)의 시대까지는 문서전달의 통신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후대에 가장 성공적으로 평가한 통신사는 변효문(卞孝文)으로 종사관 신숙주와 함께 파견되어서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세견선(歲遣船)의 숫자와 체류기간, 접대방법, 어세(漁稅) 납부 등을 자세하게 명문화시켜 두 나라 사이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후대인 들은 계해조약의 공을 종사관 신숙주에게 돌렸다. 신숙주는 성종의 명을 받아 문물, 제도, 정치, 경제, 외교, 국방, 역사, 지리 등의 정보를 항목별로 기록한 문견록을 작성하여 해동제국기를 일본국기(日本國記), 류큐국기(琉球國紀), 조빙응접기(朝聘應接記)의 3부로 구성하였다.
이중에 일본국기 가운데 8도66주(八道六十六州)와 조빙응접기 29개 항목이다. 해마다 수없이 방문하는 사신들이 일본에 실제로 있는 국가, 또는 지역의 사신들인지, 실제 있는 지역이라면 얼마나 큰 지역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기에 거추(巨酋)와 제추(諸酋)로 나누어 소개했으며, 그들이 보낸 사신을 어떤 등급으로 어떻게 접대할 것인지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이들의 접대가 외교뿐만 아니라 국방과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항목별 기사체로 작성한 해동제국기는 조선후기 통신사 사행록의 지침서로 활용 되었다.
해동제국기를 만든 신숙주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보필하면서 훈민정음 해례 제작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를 활용하는 방안으로 운회번역, 동국정운을 지어 동음과 홍무정운역훈을 지어 한음의 표기를 통일하는데 주된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뿐만 아니라 여진어, 왜어의 지명 인명에 대한 외래어 표기까지 확장하여 제시 하였다.
또한 중국과 북방 여진, 왜와의 교린분야에 있어서도 탁원한 역량을 보여 병조판서와 평안도체찰사로 여진 잔류세력들의 침략을 방어하고 징벌을 하여 관방을 평정하였다. 정치적 판단과 능력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이시애의 난과 계유정란의 평정을 이끌어 내기도한 무신이기도 했다. 역사 지리 분야에도 고려사절요 편찬과 국조보감, 동국통감, 경국대전, 세종, 세조, 문종, 예종 실록 작성에도 참여하였다.  성리대전을 바탕으로 한 천체 천문학 연구에도 남다른 역량을 과시하면서 농산축목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식과 성리학의 실천적 목표인 예악에 대해서도 예기대문언독, 국조오례의의 개찬, 산정을 위임받아 완성 시켰다.  이렇듯 신숙주는 우리말과 글의 연구가이며 정치, 외교, 국방 분야 등 각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훌륭한 관리였다.
허경진 문학박사는 조선의 정치적 격동기를 잘 극복하고 빠른 시일 내에 정치적, 국방과 외교적, 문학적으로 튼튼한 기반을 형성한 바탕에는 신숙주와 같은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뛰어난 관료가 있었기에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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