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潤福)의 자는 입부(笠父)이며, 호가 혜원이고, 혜초정원(蕙草庭園)을 뜻하는 혜원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하(李賀)가 지은 야음조숙곡(夜飮朝宿曲 : 밤새 마시고 아침이 되어야 자는 노래)에서 나오는 말이다. 혜원은 20세인 1777년 5월 10일 도화서(圖畵署) 화원에 입격하여 첨절제사(僉節制使)까지 올랐다.
혜원의 선계를 보면 고려 말의 충신(忠臣)으로 산수도(山水圖)를 잘 그리고 큰 글씨를 잘 쓰셨던 순은(醇隱 : 德?)을 시작으로 암헌(巖軒 : 檣)과 귀래정 (歸來亭 : 末舟)및 배위 순창설씨(淳昌薛氏), 영천자 신잠(申潛), 죽당 신유(申 濡), 선부(善溥)의 DNA를 물려받아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인 세장(世?), 일
흥(日興), 덕흡(德洽), 한평(漢坪), 혜원 윤복(潤福), 백파 신헌구로 이어졌다.
혜원 신윤복(申潤福)은 조선 후기 김홍도(金弘道), 김득신(金得臣)과 함께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특히 시정촌락(市井村落)의 풍속도(風俗圖) 중에서도 기녀(妓女), 무속(巫俗 ), 주점(酒店)의 색정적(色情的)인 면을 많이 그린 풍속 화가(風俗畵家)로서 현실품사(現實?寫)에 치중하고 있으며, 한량(閑良)과 기 녀(妓女)를 중심(中心)으로 한 남녀간(男女間)의 애정문제(愛情問題)나 춘의(春 意) 또는 여속(女俗)과 양반사회(兩班社會)의 풍류(風流)를 즐겨 다루어 그 만 의 독특(獨特)한 경지(境地)를 이루었으며,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 는 등을 통해 유교풍(儒敎風)의 사회에 대한 예술로서의 저항인 동시에 인간 주의적(人間主義的) 욕망을 표현하려는 의도(意圖)라고 평가 되어 왔다.
그의 그림은 섬세하고 감미로운 맛은 지금도 전통 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 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며, 그의 작품을 통해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은 1918년에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 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 도자로 활약한 그는 그의 저서 화사양가보록(畵寫兩家譜錄)과 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에서 혜원이 고령신씨(高靈申氏)이고, 신한평의 아들로 풍속화를 잘 그렸다고 짧게 언급했고,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손자인 이구환 (李九煥)은 그가 마치 방외인(속세를 벗어난 사람) 같고 여항인(閭巷人, 시정인 )들과 어울리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면서 지냈다. 라고 했다. 또 일본 의 조선미술사의 연구가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그를 시정촌락의 풍속을 정묘하고 농염하게 그린 풍속화가라고 극찬했다.
또한 근대 미술 비평가였던 윤희순(尹熙順, 1860~1935)은 조선미술계의 당면과제에서 역시 신윤복(申潤福)은 동양화의 조선화와 미술의 생활화를 실현 한 제1인자라고 말했다.'
혜원의 묘소는 당초에 9대 조모이신 광주이씨(廣州李氏)묘가 있던 경기도 양주군 연서면 구신리(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귀산동)에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 었으나 서울시 도시 확장으로 실전되어 그의 후손들이 2002년 10월 20일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 산113-1번지의 9대조 이신 안협공 묘하에 불세 출의 예술가인 혜원 신윤복의 설단묘(設壇墓)를 조성하여 참배하고 있다.
또 그의 후손들은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모아 356페이지의『도화서 화원 첨절제사 혜원 신윤복』책자를 발행 그림과 함께 동작 하나하나를 구수하게 설명을 첨가함으로서 미술을 배우는 학생뿐만이 아니라 일반인까지도 그 진미 를 알기 쉽게 설명 하고 있어 책의 인기가 폭발하고 있다.
혜원 신윤복의 작품은 간송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호암미술관,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 북한, 미국 등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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