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출신 조선시대 청백리(淸白吏) 신공제(申公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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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출신 조선시대 청백리(淸白吏) 신공제(申公濟)
  • 신인식 기자
  • 승인 2018.03.12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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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호조, 형조, 공조 등 4조판서와 우참찬, 한성판윤 등을 역임

 

신공제 공의 묘역

 

 

 

 

 

 

 

 

조선시대 이조, 호조, 형조, 공조참판과 부참찬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청백리 신공제(申公濟)공은 고령신씨 귀래정공(歸來亭公) 신말주(申末舟)의 외  아들 홍(洪)공과 초계변씨(草溪卞氏) 3남(공제, 공도, 공섭)1녀 중 장남으로 서기 1469년(예종 1년)에 전북 순창군 순창읍 남산대에서 태어났다.
  신공제의 자(字)는 희인(希仁)이며, 호(號)는 이계(伊溪)이고, 시호(諡號)는 정민(貞敏)이다. 그는 1486년(성종17년) 18세에 진사에 1등하고, 1495년(연산 군1년)11월 27세에 문과(별시 병과)에 11등으로 급제했다. 1498년(연산군 4 년)1월 5일 30세에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그의 나이 31세에 성종실록 기사관으로 참여하고, 5월에 전적(典籍) 병조좌 랑(兵曹佐郞)에 제수되었으며, 이 해에 자청하여 조부모인 신말주(申末舟 : 귀래정공)과 설씨부인(薛氏婦人)을 봉양코자 능성현령(綾城縣令: 현재의 화순군 능주면)으로 부임하였는데 그의 외모가 아름답고 인품도 고상하고 우아하였으 며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간명하면서도 부드럽고 너그러웠으나 국사를 하면서 법 집행은 과단성 있고 엄정하여 아전들은 긴장하고,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어 많은 존경을 받았다.
  어떤 아첨꾼이 도망간 신공제(申公濟 : 貞敏)공의 가노(家奴)라면서 무고한 양민들의 명단을 바치자 『나는 본디 노비가 없다』면서 내쳤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중종 4월 9일)에 있다. 당시 그가 그만큼 곧고 깨끗하였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기록이다.
  1503년(연산군 9년)12월 9일 조부(祖父)인 귀래정공(휘 : 末舟)이 75세를 일기로 돌아가시자 능성(능주)현민들이 줄지어 남산대 여막(廬幕)까지 찾아와 금품과 포목으로 조의(弔意)를 표하려 하였으나 이를 끝까지 거절했다.
  남산대에서 1리(400m : 현재 구 순창 88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고개에 상여 가 지나가는 길 위에 마포(麻布)를 펼쳐 놓고 갔지만 아무도 이를 주워가지 않 고 모두 밟아 없어지니 후세인(後世人)들이 이곳을 답포(踏布)고개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일로 인하여 연산 11년 8월에 공제(公濟)공에게 면포(綿布) 3천필 까지 특별 하사 했다.
  후대에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 : 순조때의 대제학. 당시 한시4대가의 한사 람)는 이일을 크게 찬양하고 『쉰여섯 골(팔도고을)이 모두 답포고개여라』 라 며 관폐(官弊)없는 심벌로 신공제(申公濟)공을 칭송하였다.
  38세인 1506년(연산군 12년)8월에는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제수되었 으며 9월에는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녹훈 받고 조모님을 봉양코자 남원부사를 자청하였으며 중종은 그에게 치민지방(治民之方 :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을 물으셨다는 기록(왕조실록 중종 1년)이 있다.
  조모(祖母 : 설씨부인)가 1508년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시고  또 신공제 (申公濟)공이 의정부 사인(舍人: 의정부에 속한 정4품 벼슬)으로 있을 때의 일 이다. 왜구(倭寇)들이 영남지방을 침범하여 많은 고을들을 약탈(掠奪) 하였는 데, 그 가운데에서도 창원(昌原)이 피해가 가장 심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문무(文武)를 겸전(兼全: 여러 가지를 완전하게 갖춤)한 인물을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선임하여야 하는데 마땅한 인재가 없어 고민하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의정부의 낭관(郎官: 각 관아의 당하관(堂下官: 조선시대 정삼품 미만의 벼슬)은 바로 지방의 수령으로 나갈 수 없는 관례를 깨뜨리고 신공제(申公濟)공을 창원부사로 임명하였다.
  공(公)은 임지로 내려가자 우선 이재민(罹災民)을 따뜻이 구휼(救恤)하여 민심을 수습함과 동시에 복구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창원은 곧 재건되어 재정도 튼튼히 확보되었을 뿐 아니라 교육기관도 부흥하여 오히려 다른 지방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본 경상도관찰사 손중돈이 크게 기뻐하여 신공제를 근건겸능사(勤謹廉能使 : 근면하고 청렴하며 유능한 관리)로 조정에 천거함으로써 그해 7월에 비단과 재물을 상으로 하사 받았으며,그는 통정대부(通政大夫:정삼품 당상관(正三品 堂上官)로 품계가 오르고, 이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제수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신공제 공의 옥대

 

 

 

 

 

 

 

 

1517년(중종 12년) 강원도 관찰사와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다음해 인 1518년 참찬관(參贊官)으로 효가 인도의 근본임과 교화에 힘써야함을 논의 하였으며, 승정원동부승지에 이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근무하면서 선정(善 政)으로 많은 융로(오랑캐)들을 귀화하게 하였다.
  1519년(중종 14년) 형조참판과 충청도 관찰사 겸 청주목사, 1520년 호조참판, 1521년에 경상도관찰사에 이어, 1522년에 이조참판으로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다녀왔다. 이 때 태정금(泰定琴)판을 가지고 제설작업을 하는 노파에게서 거문고를 사가지고 손수 수리한 후에 황금으로 대(竹)그림을 그렸고 정 희량(鄭希良) 시 32수를 썼다. 또 명나라 세종으로부터 향동자(香童子)와 옥대 (玉帶)를 하사품으로 받아 가져왔고, 다음해 다시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24년에 공조참판에, 1525년에 이조참판, 57세인 1527년에 이조판서에 제수되고 60세인 1528년에 지중추부사에 이어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됐다.
  이어 호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1530년 중종임금의 명으로 이행(李 荇), 윤은보(尹殷輔), 홍언필(洪彦弼) 등과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 勝覽)을 편찬했다. 
  63세인 1531년 의정부 우참찬에 이어 평안도 관찰사에, 65세때인 1533년 한성판윤에 제수되고, 이듬해인 1534년에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536년(중종 31년) 동지중추부사(동지중추부사)로 제직 중 68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서거하였다. 부음을 전해들은 중종은 조회를 거두고 예관(禮官)을 보내 부의(賻儀)하고 예장케 했다. 그의 부인은 완산이씨(完山李氏)로 호산군 (湖山君) 현(鉉)의 딸로 양녕대군의 증손녀이자 태종의 현손녀다.  슬하에 5남 5녀를 두어 아들은 련(천안군수), 수(부사과), 령(부사직), 번(사의), 굉(첨정)이 있으며,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홍복산 남뫼뇌에 있다. 지금도 이 고을 주민들은 『신대감의 묘』라고 우러러 칭송하고 있으며, 그는 화산서원에 배양되었고, 청백자수(靑白自守)한다는 뜻으로 정민(貞敏)이란 시호는 서거 290년만인 순조 29년(1829년)에 판서 김로경(金魯敬)이 시장(諡狀)에서 후손 인 경기전(慶基殿) 참봉 우모(禹模)가 여러 해에 걸쳐 가장기록과 기재유문 (企齋遺文)등을 갖고 와 청하여 증시(贈諡)되었다고 했다.
  신공제(申公濟)공은 용모가 아름답고 특히 수염이 아름다워 미염옹(美髥翁) 이라 불리었고, 20여년을 고관으로 지내오는 동안 시종일관 대의명분을 따라 권신(權臣)들의 미움을 사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한다. 
 

신공제 공이 간행한 해동명적

 

 

 

 

 

 

 

 

공(公)은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해 명나라 사신에게 줄 안평대군의 서족(庶族) 다섯 폭과 성종 어필의 병풍을 감정했다고 전한다. 그는 또한 서예 에 대한 뛰어난 안목으로 신라, 고려, 조선시대 명필 18명의 글씨를 모아 『해동명적(海東名蹟)』을 간행했다.
 

신공제 공의 친필 시

이계(伊溪)라는 호는 순창의 수석(水石)을 사랑하여 이계천(伊溪川) 가에 정자를 지어 온진정(蘊眞亭)이라 이름하고 스스로 이계주인(伊溪主人)이라고 한데서 연유하나 현재는 터만 있고 없어져, 후손(회장 방수 : 서울거주)들이 이의 복원을 위해 노력 하고 있다. 이렇듯 신공제(申公濟)공은 조선시대 4조 판서와 우참찬, 한성판윤 과 관찰사 등을 역임한 보기두문 청백리로서 오늘에 관리들과 비교되어 그의 행적이 재조명 역사에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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