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면히 이어온 조선 사마제의 전통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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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면히 이어온 조선 사마제의 전통을 만나다
  • 신인식 기자
  • 승인 2018.04.02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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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를 뽑는 시험은 오래 전부터 실시되어왔다. 신라 때도 ‘독서삼품과’라는 시험을 통해 관리를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과거 제도가 시행된 것은 고려의 제4대 임금인 광종 때부터였다. 광종은 왕권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왕에게 충성하는 신하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 출신인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실력이 있되 충성심이 높은 관리를 뽑는 과거 제도를 시행했다.
  고려 시대의 과거 제도에서 중심이 된 것은 문과였지만 기술관을 뽑는 잡과와 승려들이 치르는 승과도 있었다. 시험에 통과하면 승려도 관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를 보지 않고도 관리가 될 수 있는 음서 제도도 함께 시행되어 완전히 능력 위주로 관리를 뽑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시대 출세의 길은 각종 과거에 의한 방법과 공신의 자손에게 주는 음전의 특전, 학덕이 높은 숨은 선비를 촉탁하는 경우도 있으며, 사마시 출신자나 유학(비 과거 출신자)으로서도 출사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며 이러한 경우를 특히 남행이라고 불렀다.
 조선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여, 고려 말의 소수의 혁명파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이상대로 모든 관리를 과거를 거쳐 선발하고자 했다.
  당시의 학제를 보면 유학의 최고학부인 성균관은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을 정규학생으로 하고 정원이 미달할 경우 경내사학(중학, 서학, 동학, 남학)의 우수한 유생을 뽑아 보결생으로 했다. 과거제도를 보면 유생에게 보이는 사마시와 문과, 한량에게 보이는 무과, 중류 계급의 자녀들에게 보이는 잡과 등이 있었다. 소과인 사마시는 일종의 자격시험에 불과한 것으로 생원과와 진사과가 있다.
 당시 관리로 등용되어야만 출세할 수 있었기에 관리의 임용제도로서의 과거가 크게 주목되었다. 이 후 조광조의 주장에 의한 천거제인 현량과가 도입되었던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조선 왕조 전 기간에 걸쳐 정기적으로 과거가 실시되었다. 과거도 고려의 제도에 따라, 문과, 무과, 잡과로 크게 구분하였지만, 문(文)을 숭상하는 경향은 여전하여 보통 과거라 하면 문과를 지적할 정도로 그 비중이 컸다.
 따라서 천인(賤人)은 물론, 같은 양반이라도 서얼 출신은 응시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신분상으로는 일반 서민인 양인(良人)과 양반만이 응시할 수 있었으나, 양인이 급제한 사례는 적어 대개 순수한 양반들만이 합격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와 반면에 무과는 신분상의 제약을 훨씬 완화하여 무관의 자손을 비롯하여 향리(鄕吏)나 일반 서민으로서 무예(武藝)에 재능이 있는 자에게는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잡과는 직업적인 기술관의 등용시험이었으므로 서울과 지방 관청에서 양성되는 생도(生徒)들이 응시하였다. 
  양반들은 잡과에 응하지 않았고 일반 서민이나 천인은 이에 참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잡과는 일정한 신분계급에 의한 세습 독점됨으로써 이들에 의해 이른바 중인(中人)이라는 신분층이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모든 합격자에게 백패라는 증명서를 지급했으나, 후에 소과와 대과 합격자를 구별키 위해 대과 합격자에게는 홍패를 소과 합격자에게는 백패를 지급하였다.
  과거에는 처음으로 벼슬을 하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미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승진의 기회를 주던 제도도 있었으나, 식년시 증광시 등의 소과에는 통덕랑(通德郞:정5품) 이하로서 과거를 거치지 않은 관원은 응시할 수 있었고, 문과나 무과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堂下) 이하의 관원이 응시할 수 있었으며, 이에 합격되면 각각 그 등급에 따라 원래의 관계(官階)보다 몇 관계씩 올려 주었다.
  그리고 10년에 한 번씩 문 무 당하관(堂下官)을 위하여 설치된 중시(重試)라는 과거도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면 합격자를 위한 방방(放榜) 의식이 근정전 뜰에서 베풀어지며 왕이 홍패와 어사화(御賜花)를 제일급제자 장원(狀元)을 위시하여 순위대로 하사했다. 그리고 급제자의 부모를 위한 잔치를 관에서 베풀고, 급제자들은 3일 동안 거리를 누비며 축제를 벌였다.
  장원한 사람들끼리의 모임을 용두회(龍頭會)라 하여 관직을 맡고 떠날 때 보내는 전송연도 했다. 
  지방에는 과거제도로 소과에 입격한 선비를 사마(진사, 생원)라 하였는데 이들이 지방에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교육한곳이 사마제(司馬齊)다. 
 

순창(옥천)지역에는 진사, 생원들의 양성교육 기관으로 사마제를 세운지는 조선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정유재란 중에 왜군들에 의해 소실되었다. 
 

     
 
1621년(광해13년)에 진사 양시익(楊時益)과 옹달행(邕達行)등이 주선하여 희유재(希有齎) 북쪽에 다시 지었다. 이어 1636년(仁祖丙子)에는 진사 양여매(楊汝梅 1601~1655년)가 안(案)의 미목(眉目)을 맑게 하고 옥천사마계를 창설하였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1827년(純宗丁亥)에는 사마가문의 후학 양석열, 홍재형 두 분께서 회유제(會儒齊)북쪽에다 사마제를 이건(移建)하여 향풍을 진작하였는데  불행하게도 1909년(純宗乙亥) 일본헌병대의 만행으로 사마제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2년 왜인폭정(倭人暴政)하에서 권현식, 홍헌표 두 진사가 사마가문제유와 더불어 임술안(壬戌案)을 개간(開刊)하였고, 그 후 몇 번의 중간과 재 중간을 거쳐 1993년 옥천사마영사회(玉川司馬永嗣會)라 개칭하고 사마회 복원을 시도하여 후손과 유림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1998년 사마가문 100년의 숙원이던 사마제(司馬薺)를 순창군 순창읍 교성1길 14-8에 중건하였다. 옥천사마영사회(玉川司馬永嗣會)에 순창(옥천)출신 사마는 총164현으로 그 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사마유현들의 후손들이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결성된 단체다. 
 

옥천사마영사회 윤형호 회장은 오는 7월 3일(화) 10시 30분에 옥천 164명의 사마성현들을 기리는 전통 제례행사를 통하여 점점 쇠퇴대어 가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숭조사상과 전통유교문화유산을 계승 발전시키는 기회를 매년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곳에 봉안되어 있는 36성씨 중 남원 양(楊)씨 집현전대제학 이시(以時), 어은(漁隱) 사형(士衡) 등 30현, 순창설(薛)씨는 옥은(玉隱) 세옥(世玉)등 16현, 옥천조(趙)씨는 농은(農隱) 원길(元吉)등 15현, 고령신(申)씨는 12세의 어린나이에 전라백시에 장원한 장(檣), 전주부윤 말주, 청백리 이조판서 공제, 죽당 유(濡)등 13현, 남원홍(洪)씨는 효도를 실천하여 향인들로부터 추앙받은 선(?)등 9현, 남원윤(尹)씨는 병자호란 때 의병을 창의한 잡(?)등 7현, 청주한씨는 순창군지를 정립한 지산(芝山) 치명(致明)등 6현, 서산유(柳)씨는 정조때 사마시에 입격 문학으로 이름을 떨친 동환(東煥)등 6현, 옥천 옹(邕)씨는 청백리 몽진(夢辰)등 5현, 전주최씨 5현, 울산김씨 는 성리학의 대가 김인후(金麟厚)등 4현, 창녕 조(曺)씨는 1609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과 현감을 역임한 응휴(應休)등 4현, 라주 윤(尹)씨는 1488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통덕랑 충주판관인 달신(達莘)등 4현, 강릉김(金)씨는 1488년 문과에 급제한 대사성 효간(孝侃)등 4현, 문화 유(柳)씨는 호계(虎溪) 동유(東游)등 3현, 진주 강(姜)씨는 동천(桐川) 홍국(弘國)등 3현, 밀양 박(朴)씨는 1814년 사마시에 입격하여 학문이 깊고, 효우융독(孝友隆篤)한 문구(文龜)등 3현, 평택 임(林)씨 는 1754년 사마시에 입격 성균 생원이 된 계준(啓濬)등 2현 기타 17성씨 21현 등이며 회원은 총700여명에 이르고 있어 참배의 행렬이 연중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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