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진 죽음보다 사는 가치가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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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진 죽음보다 사는 가치가 우선
  • 장세진
  • 승인 2018.07.3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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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진(방송·영화·문학평론가)
7월 23일 두 명의 사회 지도층이랄까 유명인이 우리 곁을 떠났다. 교과서에 수록된 소설 ‘광장’으로 유명한 소설가 최인훈과 정의당 원내대표 노회찬 국회의원이 그들이다. 최인훈 소설가는 지난 3월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경기도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다 84세로 삶을 마감했다. 반면 62살밖에 되지 않은 노회찬 국회의원은 자살이란 극단적 방법으로 생을 마감했다.
천수를 누린 자연사가 아니기에 호상이라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소설가 최인훈의 나이를 감안하면 장수한 셈이다. 반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으로 볼 때 아직 젊은 나이인 노회찬 국회의원의 경우 안타까움 이상의 뭔가가 차오른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명 정치인이어서다. 내가 유명인 자살에 대한 생각을 쓰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2008년 10월 2일 만인의 연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최진실이 목맨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나는 뜻밖의 비보를 접하고 ‘죽을 용기로 살지, 그런다고 죽냐’라는 제목의 글(부천자치신문, 2008.10.11.)을 썼다. 잡지사(월간 수필문학) 편집자가 그 글을 잘 읽었다며 11월호 게재를 요청해왔기에 그렇게 하라고 동의해주었다.
분명한 것은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인간 누구에게도 삶에는 고통과 괴로움, 슬픔과 외로움 등이 따르기 마련이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원래 그렇다. 그럼에도 삶은 축복이다. 아름다운 것이다. 의미와 가치가 충분한 것이다. 죽을 용기로 살면 못 헤쳐나갈 것이 없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죽는다. 대략 그런 요지의 글이다.
그로부터 7개월쯤 지난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학생들을 인솔하여 백일장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개회식에서 사회자가 알려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온국민의 오열과 추모 속에서 끝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을 지켜보고 쓴 글이 ‘주례사 선생님 노무현’(한겨레, 2009.6.8.)이다.
임기를 마치고 봉하마을로 돌아간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9월 6일 강금원 창신섬유회장과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 자녀 결혼식이 열린 시그너스 골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례를 서기 위해서다. 당시 내가 편집인 겸 지도교사로 있던 ‘전주공고신문’ 제작을 위해 갔던 길이었다. 강금원회장은 전주공고 출신이고, 전 대통령 결혼식 주례는 기사 가치가 충분했다.
거기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나본 일화 등을 소개한 후 갑작스런 서거에 대해 말한다. 솔직히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에 대해선 잘못이라 여기고 있다. 삶과 죽음은 엄연히 다를 뿐 아니라 무엇이, 그리고 누가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느냐, 열 번을 생각해도 이미 죽음이 자신 혼자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개 국회의원일 뿐이지만, 노회찬 원내대표도 그와 비슷한 경우다. 한 마디로 최근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2위에 오른 정의당의 간판격 국회의원이어서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영결사에서 “당신은 항상 시대를 선구했고 진보정치의 상징이었다”며 “당신은 여기서 멈췄지만 추구하던 가치와 정신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보도에 따르면 서울 노회찬 의원의 빈소에는 3만 8700여 명의 조문객이 다녀갔다. 전국 시 ? 도당에 마련된 분향소까지 합하면 7만 2300여 명의 조문객이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대단한 추모 열기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대체 불가능한 정치인을 떠나보낸 아쉬움과 그가 보여준 ‘옳은 정치’에 대한 지지와 연대가 두루 반영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런 걸 보면 노회찬 별세는 값진 죽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값진 죽음이면 뭐하나. 값진 죽음이라한들 사는 가치를 우선할 수는 없는데…. 유서에 따르면 그는 드루킹측으로부터 받은 4,000만 원에 대해 ‘어리석은 선택’이라 했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당원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자책했지만, 그만한 일이 ‘죽을 짓’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수 억, 수십 억 검은 돈을 받고도 정치 탄압 운운하거나 뇌물이 아니라며 손사래치는 범법자 등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사람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선택’은 따로 있다. 말할 나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다. 죽으면 모든게 끝이니 자신은 맘이 편할지 몰라도 살아있는 자들에게 너무 무책임한 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그의 유고로 민주평화당과 이룬 원내 교섭단체 지위를 잃어버리지 않았나. 설사 죽을 짓이라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답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그런 선택을 했겠느냐는 긍정 내지 동정론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생각도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값진 죽음보다 사는 가치가 우선이라는 점이다. 어쨌든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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