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의 참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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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의 참뜻
  • 허성배
  • 승인 2018.12.2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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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주필
2018년이 꼬리를 접는 다사다난했던 무술년 종장(終章)에서 또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예년과 다름없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장식과 ‘캐럴’ 이 거리마다 넘실거린다.
이제 크리스마스 는 8억여 명의 세계 기독교인 뿐 아니라 공산독재 세계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 지구촌 사람들에게 축복과 은총(恩寵)의 날로 저항없이 수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역사가 훨씬 긴 불교나 유교보다도 맨 먼저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정된 것이다.  한때 『X 마스 · 이브』 하면 일부 계층에서는 방황하고 들뜨고 술렁인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시민의식은 경제 성장과 함께 놀랍도록 높아졌다.
극히 사소한 탈선을 제외하고는 이 근래에 들어서는 24 일의 ‘이브’ 만 해도 경건하고 성스럽게 보내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만큼 기독교는 이 땅에 뿌리가 정착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국에 있어서 기독교는 그 포교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때 별난 역사적 특수성이 금방 눈에 뜨인다.
그것은 세속적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장기적인 안정을 누려왔던 유럽의 그것과는 달리 피로 물든 순교(殉敎)를 통해서 이 땅에 그 첫선을 보였기 때문이다.
천주교에 이어 지난 세기말(世紀末)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는 처음부터 중앙의 벼슬아치나 세도가(勢道家)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지방의 두메마을에서 천대받는 무학. 무력(無學. 無力)한 상인(常人)이나 부녀자들을 상대로 복음(福音)을 펴 왔던 것이다.
한말(韓末)의 어지러운 세태속에서 기독교의 선교사들은 나라를 잃고 살 길을 잃은 이 땅의 가난하고 못배우고 병든 길잃은 양(羊)들을 위해서 목자(牧者) 구실을 다 했었다.  기독교는 곧 개화 문명 자유민주주의 진보의 복음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일제식민(日帝植民)치하에서도 기독교는 국권을 되찾으려는 애국지사들과 더불어 잔인무도한 왜구(倭寇)의 군국주의 압제자에 저항하여 국민들을 일깨웠고 국제적 연대를 위한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항상 권력의 편이 아니라 국민의 편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방후에도 유독 공산주의에 대한 사상적 방파제 역할을 하여 왔다.  올해도 성탄절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그 참뜻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예수는 비록 ‘이스라엘’ 의 벽촌 ’베들레헴’ 이라는 작은 마을 마굿간에서 태어난 한 목수(木手)의 아들이긴 하지만 그가 남긴 가르침은 해량(海諒)하기 힘들다. 현대문화와 문명속에서도 인간의 심층부에서부터 근본적으로 선(善)하게 혁신시키는 이념과 힘을 계시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부터 평등하다는 말은 철학적 이론이나 정치학설로는 사실 애매하다.  그러나 예수는 모든 사람은 신(神)의 자녀이기 때문에 동기를 감싸듯 사랑해야 하고 서로 돕고 서로 위로하며 인간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남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죄와 같고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은 도둑의 죄와 같다고 했다.
또 5리를 가자거든 10리를 가주고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을 내주고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을 벗어주며 남을 도와주고 구제할 때는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은밀히 하라고 했다.
불우이웃 돕기에 성금 몇 푼 내놓고 이름 석 자나 얼굴을 내려는 일부 졸부 계층을 생각하면 2 천 년 전 예수의 가르침이 폐부를 찌르지 않는가!
‘그리스도’ 의 참사랑의 의미와 함께 올해도 성스러운 성탄절을 맞아 그 함축된 내재적(內在的) 가치를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다가오는 새해(己亥年)에는 세계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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