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과 먹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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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과 먹튀
  • 장세진
  • 승인 2019.05.1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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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진(방송·영화·문학평론가)
큰딸 결혼식을 치른지 3주가 되었다. 혼주가 되어 막상 치르고 보니 처음이라 그런지 자식 결혼시키는 것이 형제들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부모상보다 훨씬 더 큰일임을 실감하게 된다. 큰딸 결혼식은 나로선 2015년 5월 회갑기념 문학평론집 출판기념회 이후 4년 만에 가진 행사다. 나의 출판기념회에 비하면 그야말로 집안 대사(大事)를 치른 셈이다.
딸과 사위, 그리고 사돈댁까지 모두 서울에 살지만, 그러나 결혼식은 내가 50년 넘게 살고 있는 전주에서 가졌다. 상견례 자리에서 소원이라는 나의 말을 사돈 내외가 흔쾌히 수용해줘 그럴 수 있었다. 마침 결혼식에서 잠깐 마이크 잡는 기회가 있어 나는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신부쪽 하객들로 하여금 서울에서 온 손님들을 향해 박수로 환영하는 퍼포먼스를 가진 것.
사실 전주에서의 결혼식이 내 소원이 된 것은 축하객들과 무관치 않다. 서울 결혼식일 경우 일가친척들이야 대부분 간다하더라도 지인들이 과연 얼마나 전세버스에 오를 수 있을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또 전세버스 탑승 여부를 알기 위해 청첩장 발송과 별도로 전화나 문자로 일일이 확인할 일이 너무 심란스러웠다.
그렇게 치른 큰딸 결혼식이건만 축하객중 절반쯤 되는 분들이 전화나 문자를 통해 결혼식장에 직접 올 수 없다는 사정을 전해왔다. 그들 포함 많은 분들이 그냥 계좌이체를 하거나 우편환 등으로 축의금을 보내왔다. 혼주인 나로선 꼭 와야 맞을 것으로 생각했던 지인들이 간접 축하로 대신하는 바람에 솔직히 되게 섭한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축의 내용을 살펴보곤 4년 전 출판기념회때처럼 ‘받고도 갚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음 역시 다시 알게 되었다. 그때는 그러려니 생각하며 그냥 넘어갔다. 특히 문인들과 다르게 교원 등 일반인의 경우 생전 없을 출판기념회이니 그들로선 품앗이 대상이 되지 못할 수도 있겠지, 뭐 그런 이해를 하려고 최대한 노력한 결정이라 할까.
그러나 부모상보다 더 큰일인 자식 결혼식임을 깨닫게된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결혼식 1주일쯤 지나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아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애경사는 품앗이이다. 애경사때 서로 주고 받는 미풍양속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 가정에서나 그렇듯 그 내역을 가려 다음 애경사때 품앗이하는게 일반적이다.
요컨대 내가 출판기념회를 비롯하여 조문이나 자녀 결혼식 등 애경사에 직접 가거나 부조(扶助)한 경우 그들로선 품앗이해야 맞다는 것이다. 응당 이번에도 품앗이하지 않은 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지만,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거나 못하는 그들을 더 이상 이해해줄 필요는 없었다.
4년 전 출판기념회는 그렇다쳐도 딸아이 결혼식인 이번엔 그걸 품앗이해야 맞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생각이다. 혹 나를 ‘독한 놈’이라 속으로 욕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지만, 상관없다. 그들이 먼저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거나 못했으므로. 편지를 보낸 절반쯤 되는 분들이 미안하다며 뒤늦은 축하를 전해왔다.
그런데 청첩장을 받지 못했다는 분들도 있어 난감하게 되었다. 등기 우송이 아니라 생긴 본의아닌 불상사라 할까. “도대체 연락을 받은 바 없는데, 어떻게 품앗이를 하냐”면서도 여러 분이 큰딸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런 편지를 보낸 결례가 되어버렸는데도 너그럽게 용서하며 축하해준 분들에게 죄송하다. 물론 편지로 그 마음을 따로 전했다. 
큰딸 결혼식을 치른 전체적 소감은 밥값을 못하는 사람들과 먹튀에 대한 깨달음이다. 가령 청첩장으로 이미 안내했는데도 문자 등을 통해 계좌번호를 묻는 경우가 그렇다. 그것은 소리없이 축의금을 보내온 대다수 사람들과 다른 행보다. 대학을 나오고, 무슨무슨 장을 지내고, 그런 경력이 맞는지 왈칵 의구심이 생기는, 밥값을 제대로 못하는 행태라 할 수 있다.
먹튀는 글자 그대로 사라져버린 경우다. 일단 그들의 잘못이 아닐 수 있긴 하다. 내가 받은 그들의 청첩장에 적힌 전화, 주소 어느 것 하나 맞지 않아 아예 연락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좀 아니지 싶다. 자녀 결혼식이나 부모상을 치른 그들이 보낸 감사인사에서 말한 ‘귀댁 애경사에 대한 보은’이 허언(虛言)으로 끝난 셈이어서다.
아주 고약한 경우도 있다. 큰딸 결혼식에 불참한 분을 그후 어떤 행사에서 만났는데,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다. 지난 해 10월 시간이 겹친 다른 출판기념회를 빠진 채 그의 아들 결혼식장에 가서 축하했는데도 그 모양이다. 나는 65년 인생을 헛살은 것일까. 큰딸 결혼식 혼주로서 썩 즐겁거나 기쁘지 않은 그런 생각들이 꾸역꾸역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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