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아,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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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아, 청와대
  • 장세진
  • 승인 2019.06.1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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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진(방송·영화·문학평론가)
하필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날 청와대 관람길에 올랐다. 문학기행 안내를 보고 직방 신청한 것은 가는 곳이 청와대여서다. 흔하거나 쉽게 가볼 수 없는 청와대이기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신청에 추호의 주저함이 없었다. 문학기행에 일종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나로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만하다.
내가 문학기행에 나선 것은 거의 30년 만이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1980년대말 기세좋게 문학기행에 나선 후 처음 일이다. 속된 말로 학을 떼서 이후 어떤 문학기행도 가지 않았다. 그로 인해 회원으로서 손해도 많이 보며 산 문인이 되고 말았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을 단돈 2~3만 원(회비)에 가볼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니까.
문학기행에 학을 뗀 이유는 하나다. 그만큼 단순하다. 명색 문인들이고, 그래서 야유회나 친목여행이 아닌 문학기행인데, 실상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아직 오전 대절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지 않았는데도 술 마시고 노래까지,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아수라장이 펼쳐진 것이다. 그런 놀음판은 귀로(歸路)에 오른 차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을 떨쳐낼 만큼 ‘가즈아, 청와대’인 셈이라고 할까. 몇 년 만에 만나는 아침 7시의 상쾌함인지 모르겠다. 집을 나서자 살짝 설레임 같은 것이 안겨온 청와대 나들이는, 그러나 가보기도 전 심신을 지치게 했다. 2호차에 탑승한지 30분도 더 지나서야 출발한 것이다. 유인물을 읽다가 조는 듯 마는 듯 국회 헌정기념관에 도착했다. 오전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우리 일행을 맞이한 건 엉뚱하게도 지역구 아무개 국회의원이었다. 결과적으로 형이 누려야 할 재선의 기쁨을 앗아간 의원이라 피하고 싶었지만, 그냥 청해온 악수를 하고 말았다. 서울 오는 버스에선 웬 약장수가 정안휴게소 이후 여행에서의 사색을 빼앗는 등 기분을 망쳤는데, 이번엔 11개월 앞으로 다가온 선거운동차 나타난 지역구 국회의원이라니!
배추김치 없는 헌정기념관 구내식당 식사를 마치고 단체사진도 찍은 후 청와대로 향했다. 차안에서 신원 학인, 검색대의 소지품 검사를 거쳐 마침내 청와대 경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홍보관에서 문재인 대통령 취임식 등이 담긴 영상물을 시청한 후 녹지원→구 본관터→본관→영빈관→칠궁→무궁화 동산→청와대 사랑채 순서로 관람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흡연하시면 안됩니다!”
야외 행사 장소로 TV 뉴스에서도 더러 보았던 녹지원 설명을 들을 때였다. 77명의 우리 일행 등 200여 명이 경호원 안내로 이동하다 잠시 걸음을 멈춘 사이 담배를 피워문 내게 스포츠형 머리의 젊은 경호원이 나무라듯 한 소리였다.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금연’이란 팻말이 없어 한 흡연인데, 경호원은 이어서 변명하듯 “불이 나면 안될 곳이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말로만 듣던 청와대에 와보니 상당히 널은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왕조시대 임금 사는 곳을 구중궁궐이라 했는데,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게 생각될 정도다. 햇볕이 따사로운 대낮이야 그럴리 없지만, 밤에는 사정이 달라질 법하다. 문득 사상 초유의 탄핵으로 물러난 미혼여성 박근혜 전 대통령이 머물만한 공간은 아니지 싶은 생각이 스쳐간다.
최순실과 박근혜 기 치료사들이 드나들었던 곳이 어디냐 물어보라며 깔깔대는 인파 소리에 새삼 참 많이 바뀐 세상이라는 생각도 절로 난다. 걸핏하면 ‘좌파독재’라는 소릴 해대는 자유한국당이 있지만, 영상물 시청 전 받은 청와대 방문 기념품에 새겨진 ‘국민의 나라’만큼은 모든 방문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뒤 새겨진 ‘정의로운 대한민국’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점은 칠궁ㆍ무궁화 동산과 함께 경내 밖에 있는 청와대 사랑채에서도 엿볼 수 있다. 2층에 있는 대통령 집무 책상에 앉아 온갖 폼을 잡고 사진까지 찍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일반인은 안되고 청와대 관람객에게만 개방되는 칠궁(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들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라든가 김영삼 대통령이 옛 ‘안가’를 헐어내고 조성한 ‘무궁화 동산’ 등도 이채롭다.
그런 대로 의미있는 30년 만의 문학기행이라 만족해하며 차에 올랐다. 예정보다 40분 이상 늦어진 서울 출발이라 20시 도착이 될지 의문이었다. 그런 와중인데, 버스는 서울 시내 포함 1시간 남짓 달리더니 멈추었다. 기흥휴게소다. 의아해하며 화장실을 다녀와 차에 오르려는데, 웬걸 그 뒤편에서 깜짝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관광버스에서 접이식 상과 의자 따위를 제공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놀라움과 함께 어이가 없었다. 내색은 하지 않은 채 나는 잠시 앉았다 이내 자리를 떴다. 담배를 피는 등 하릴없이 기다린 시간이 무려 60분이다. 다시 출발한 차내에선 듣고 싶지 않은 노래 소리가 귓청을 따갑게 했다. 3명으로 그쳐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러려고 30년 만에 문학기행을 나선게 아닌데….
30년 만에 나선 문학기행이라 그런가. 궁극적으론 모든 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긴 하지만, 난데없는 약장수에 국회의원, 휴게소 술판까지 별의별 체험이란 대가(代價)를 치른 청와대 나들이가 되게 씁쓰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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