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철 전 의원,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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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철 전 의원,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오다
  • 엄범희 기자
  • 승인 2009.06.1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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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국회의원릴레이인터뷰):이광철 전 국회의원

“4년 동안 주셨던 큰 사랑을 가슴에 담고 시민 이광철로 돌아갑니다.”
17대 국회 임기동안 굵직굵직한 족적을 남기고 지난달 29일 평범한 전주시민으로 돌아온 이광철 전주완산을 전국회의원.

이광철 전의원은 임기동안 새만금 사업과 무주 태권도 공원 특별법 국회통과, 전북 3조원 시대 예산 확보 등 중심에 있었다.특히 ‘서울공화국’이 아닌 모든 지역이 골고루 잘 사는 대한민국으로 가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지역균형발전의 토대를 만드는 일에 주력했다.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과 한스타일 거점도시사업을 본궤도에 올려놓았고 한국관광공사 전북지사 설립 역시 성사시켰다. 그는 이익보다 원칙을 먼저 앞세우려 했고 순간의 인기보다는 국민과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면서 일했다.

이 전의원은 나름대로 뿌듯한 성과도 많았고 아쉬운 일, 못 다한 일들도 있었지만 흔들림 없이 초심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시민으로 돌아온 이광철 전 국회의원을 만나 지난 4년동안의 성과 등을 들어본다.

▶이번 총선에서 공천탈락 이후 출마 포기라는 용단을 내리셨습니다. 개혁공천의 성공을 위해 기꺼이 밀알이 되기 위해 출마를 포기하셨지만 주변에서는 아쉬워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주위에서 무소속 출마를 강하게 권유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지지자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들을 믿고 끝까지 해보자고 호소할 때는 저도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천 탈락 후 탈당과 무소속 출마라는 것이 바람직한 정치행태가 아닌 잘못된 관행인데, 정치개혁, 정당개혁을 정치활동의 목표이자 가치로 삼고 있는 제가 그 길을 걸을 수는 없었습니다.”

▶국회 문화관광위원으로 활동하시면서 전북을 물론 한국 문화발전에 한 획을 그으셨습니다. 4년여동안 국회 문광위원으로 활동하시면서 의정활동 주요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의정활동을 통해서 ‘지역’이라는 화두를 제기한 것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면서 지역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17대 국회 임기 내내 줄곧 ‘서울공화국’이 아닌 모든 지역이 골고루 잘 사는 대한민국으로 가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지역균형발전의 토대를 만드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지역문화진흥법 제정을 추진했고, ‘지역신문발전위원회’와 ‘지역방송발전위원회’를 국가기구로 설치해 열악한 경영환경에 처한 지역언론을 지원토록 했습니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자본의 투자 못지않게 지역문화와 지역언론의 진흥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을 수도권의 유명 대학들이 독차지하지 않고 지방대학들에도 충분한 입학정원이 배정되도록 하는 활동을 했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면담을 통해서 로스쿨 전국 총정원의 48%를 지방대학에 배정하는 정부방침을 이끌어내었고, 우리 지역의 전북대학교와 원광대학교에 로스쿨이 설립이 확정됐습니다. 특히 우리 지역과 관련해서는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과 한스타일 거점도시사업을 본궤도에 올려놓았고 한국관광공사 전북지사 설립을 성사시킨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또 한 가지 일본 우토로마을 동포들의 거주권 문제를 해결한 것도 큰 보람을 느끼는 일입니다. ‘우토로’는 일본 교토부 우지시에 있는 일제 강제 징용 조선인 마을로서 지금까지 한일 양측 정부 어느 쪽으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차별과 빈곤을 견디면서 살아오다가 강제철거의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지난 2005년부터 ‘우토로국제대책회의’ 공동대표와 ‘우토로를 생각하는 국회의원모임’ 대표로 활동하면서 국내에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캠페인과 모금운동을 벌였고 정부 차원의 대책을 촉구해왔습니다. 그 결과 올해 국가예산으로 우토로마을의 토지매입비 30억원을 지원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한평생을 민주주의의 편에 서서 살아온 민주주의자로 알고 있습니다. 걸어오신 길을 말씀해 주십시오.
“1956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이 개신교 교단 중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회자였던 덕분에 고등학생 시절부터 교회 학생회 활동 등을 통해 자연스레 박정희 유신독재에 대한 비판의식에 눈을 떴습니다. 1974년 전북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이후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수배와 불법연행, 고문과 구속을 연례행사처럼 겪으며 70년대의 절반과 80년대를 지나왔습니다. 그로 인해 ‘5.18 유공자’라는 과분한 영예를 얻기도 했습니다. 1984년에 전국 최초의 공개적 지역민주화운동조직으로 출범한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전북민협)’의 사무국장과 상임위원장을 맡아 일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길청년회’ ‘전주시민회’ 등 대중조직을 조직하면서 시민운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교육문제, 언론개혁, 환경 등 다양한 의제를 중심으로 자발적인 참여를 조직하면서 ‘전주시민회’가 시민 속에 뿌리내리고 새로운 대중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싹틀 무렵이었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격으로 난데없는 ‘간첩’의 누명을 쓰고 또 다시 수배자 신세가 됐습니다. 2년여의 도피생활과 구속, 10개월이 넘는 법정투쟁 끝에 무죄판결을 받고 국가로부터 800만원의 배상금을 받았습니다. 생애 네 번째의 징역살이였습니다. 이 때 무료변론을 맡아 저의 법정투쟁을 도운 사람이 80년대부터 인연을 맺고 지낸 친구 임종인 변호사입니다. 임 변호사는 그 후 십여 년 세월이 지난 뒤 의원회관에서 바로 옆방을 쓰는 동료 국회의원으로 다시 만났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또 다른 차원의 모색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정치개혁을 통한 사회개혁’입니다.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인식에 다다른 것입니다. ‘전북지방자치개혁연대’를 조직하고 상임대표로 일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저 자신이 공직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는 전혀 없었기에 건강한 후배들의 정치적 진출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전북지방자치개혁연대’는 2002년 지방선거에 32명의 젊고 개혁적인 후보들을 출마시켰는데, 결과는 24명 낙선, 기초의원 8명 당선에 그쳤습니다. 그나마 선전한 것이라며 서로를 위로하였지만, 어쨌거나 현실정치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한 좌절이었습니다. 참여정부의 출범 직후 지역의 재야원로 어른들과 후배 활동가들로부터 제17대 총선 출마를 권유가 잇달았습니다. 전북지역 시민사회운동진영도 적극적인 정치세력화를 도모할 시기가 되었으니 대표성을 갖고 정치권 진출을 결단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저의 내면에 현실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편견과 일종의 결벽증도 남아있었고, ‘운동권에서 정치인으로의 변신’이 두렵다면 두려웠지만 저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회피하지 않고 감당하기로 결심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국회를 떠난 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고, 어떤 형태로든지 지역의 발전과 정치발전에 기여하는 활동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특히 평범한 생활인들이 즐겁게 참여하고 지역주민이 함께하는 생활정치의 모델을 연구하고 정착시켜나가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광철이 걸어온길:전북대학교 철학과 졸업, 민통련 지역운동협의회 대표, 전주시민회 대표, 시민행동21 공동대표, 전주 완산을 제17대 국회의원, 우토로를 생각하는 국회의원모임 대표, 국회 문화관광위원, 국회 방송통신특별위원, 전북대학교 총동창회장(현)/엄범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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