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맞아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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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맞아 감회가 새롭다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0.03.0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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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주필

세계 2차 대전 시 미국이 원폭 투하 대상으로 고려한 일본의 도시는 애초 여러 곳이 있었다.

1945년 5월 10~11일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는 니가타, 교토,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다섯 도시를 목표로 설정했는데 니가타는 외부 표적과 너무 떨어져 있어 최종 제외됐다.
교토,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의 특징은 모두 `일본의 기초가 된 도시`라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교토는 일왕의 조상, 히로시마는 조슈번 주였던 머리 가문 조상이 살던 땅이자 청일전쟁에서 대본영이 위치했던 도시였다. 고쿠라는 청일전쟁의 전후처리 조약이 체결된 도시이고, 나가사키는 메이지 유신의 배후였던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의 본거지였다.
원자폭탄 `리틀보이`는 히로시마 현지 시간으로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투하됐다. 폭탄은 고도 9,470m에서 43초 동안 떨어져 후쿠시마 외과병원 상공 580m 지점에서 폭발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엄청나게 밝은 빛과 함께 수억 도에 달하는 엄청나게 뜨거운 화구가 공중에 생겼다. 폭 심지 부근 온도는 약 3,000~4,000도에 달했다. 열선과 방사선으로 증발한 사람들의 검은 흔적이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뒤이어 최대 초속 340m에 달하는 엄청난 열 폭풍이 반경 1.5㎞를 초토화 시켰고 주변 11㎢가 불에 탔다. 폭탄 투하 시간이 출근 시간이어서 피해는 더 컸다. 폭 심지 인근 한 은행에서는 두꺼운 석조건물 가장 안쪽에 있던 여직원 2명을 제외하고 모두 절명했다. 노무라에 이조라는 남성은 폭심 집에서 불과 17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나 콘크리트 빌딩 지하에 있어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원폭으로 히로시마 인구의 약 30%인 7만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1945년 말 총 사망자는 16만 6,000명으로 집계됐고 1950년까지 피폭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까지 합치면 약 20만 명에 이른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대한제국 황족인 이우 공이 대표적이다. 일본프로야구의 전설인 장 훈의 큰누나 역시 원폭으로 인한 전신 화상 때문에 12세에 사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으로 발생한 총 74만 명의 원폭 피해자 중 한국인 피해자는 10만여 명에 달한다.
5만 명은 즉사했고, 4만 3,000명이 영구 귀국했다. 일본에 남은 7,000명 중 현재 생존자는 2,600여 명이다. 1974년부터 2015년까지 기나긴 소송 끝에 일본인 피해자에게 국한됐던 무료 전액 치료를 일본 외 타국 어디에 있든 지원받는 것으로 재판이 마무리됐다.
1971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임기 당시 히로시마를 방문해 피폭자 위령탑에 헌화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원폭 기념비에 헌화 하면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게도 애도를 표했다.
잔인했던 역사의 한 장이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무리가 안되고 있지만 다시는 인류멸망의 핵전쟁은 이 지구 위에서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은 불장난 같은 핵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것에 대해 전 세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UN 제재는 날로 압박을 가하고 있는데도 북한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립을 자초 하고 있어 3.1정신을 맞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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