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유씨는 전남 고흥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시조는 호장 유영(柳英)이다. 시조 영(英)의 6대손 청신(淸臣)이 고려 충선왕 때 찬성사, 첨의정승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탁(濯)이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도첨의 정승에 올랐다. 탁의 아들 습(濕)이 조선 태종 때 이조·예조 전서를 거쳐 세종 때 우군원수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했다. 습의 4대손인 유충관(柳忠寬·1496~1539)은 문과에 1등으로 급제해 승문원 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이후 평안도 군직과 병조, 사간원, 홍문관의 관직을 거쳐 금산 군수를 비롯해 평안도, 전라도 등에서 근무했다. 그는 특히 다방면에 재주가 뛰어났는데, 특히 활을 잘 쏘아 과녁인 버드나무를 뚫을 정도였다고 한다. 유충관의 증조할아버지는 승의교위(承義校尉) 유지(柳漬)이고, 할아버지는 진도 군수 유호지(柳好池)이며, 아버지는 도총 경력(都摠經歷) 유의(柳依)이다. 어머니는 남조(南祚)의 딸이다. 부인은 청백리 신공제(申公濟)의 3째 딸이다. 아들은 진사 유탱이고, 손자가 몽사, 몽표, 몽웅, 몽인등의 후손들이 국가와 민족이 어려움에 있을 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국난 극복에 앞장선 선구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편집자주
▲대마도 정벌에 승리한 유습장군(양정공)
유습장군은 1367년(공민왕 16년)에 태어났고 본관은 고흥이며, 고려 말 시중 유탁의 아들이다. 시호는 양정공이며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으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의 도절제사를 역임했다. 유습장군은 세종원년 (1416년) 이종무장군(삼군도절제사) 이숙묘, 황의, 우박 (중군도절제사) 이지실장군(우군도절제사)등과 함께 대마도 정벌에 좌군도절제사로 참여했다. 왜구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500여 차례 이상 우리나라를 침략해왔다. 조선 수군 10,728명은 전함 227척을 거느리고 1416년 6월 19일(음력) 거제도 견내량을 출발했다. 하룻만에 대한해협을 지나 대마도를 정벌하고 왜구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대마도를 조선의 정치질서 속으로 편입하고 조선국왕이 관직을 내려 왜구통제의 의무를 주고 무역을 허락했다.
570여년이 지난 지금도 괘등석의 불빛이 보이는 대부분의 토지는 고흥유씨 소유이다. 묘를 이장할 때 학 세마리가 묘지에서 날아갔는데 한 마리는 학소포로 한 마리는 비학골로 다른 한 마리는 학림사 방향으로 날아갔다고 전해지며 묘비에 새겨진 白首歸鄕口不言朝廷事(흰머리 돼 고향에 돌아왔으니 조정일은 말하지 않겠다)했다.
우리나라는 오천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침을 받았음에도 응징하지 못했으나 대마도정벌은 우리 역사상 큰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대한제국기 정미7조약 체결 후
연해주에서 13도창의군의 도총재로 활약한 의암 유인석 의병장
유인석의병대장은 중시조 유습장군의 17대손으로 1842년(헌종 8)~1915년 대한제국기 정미7조약 체결 후 연해주에서 13도창의군의 도총재로 활약한 의병장으로 위정척사론자이다.
유인석 의병진은 한때 3,000명을 넘었으며, 제천·충주·단양·원주 등지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 일대를 석권하면서 친일적인 관찰사나 군수 등 ‘토왜(土倭)’들을 처단해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선유사 장기렴(張基濂)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격으로 최후의 거점인 제천성을 상실했다.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재기 항쟁을 도모하기 위해 황해도·평안도로 이동했다. 그렇지만 양서지역에서의 재기 항쟁도 어려워지자 청나라의 군사적 원조를 기대하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갔다. 그곳에서 도리어 회인현재(懷仁縣宰) 서본우(徐本愚)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게 돼, 같은해 7월 28일 혼강(渾江)에서 의병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의병해산 후에는 한인(韓人)이 많이 살고 있던 통화현 오도구에 정착했다. 1897년 3월 고종의 소명으로 일시 귀국했으나 곧 이 곳으로 재차 망명했다. 1898년 10월에는 부근의 팔왕동(八王洞)으로 이주해 여러 성현의 영정을 봉사(奉祠)하는 성묘(聖廟)를 세우기도 했다. 한인 간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향약을 실시하기도 했다.
1900년 7월 의화단의 난을 피해 귀국한 뒤로는 양서지역 각지를 돌며 존화양이론에 입각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주력해 이진룡(李鎭龍)·백삼규(白三圭) 등의 의병장을 배출했다.
1907년 고종의 퇴위와 정미칠조약체결을 계기로 국내활동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 연해주 망명을 결심했다. 1908년 7월,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곳에서 이상설(李相卨)·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분산된 항일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꾸준히 노력했다.
그 결과 1910년 6월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결성을 보게 됐으며, 이상설·이범윤·이남기(李南基) 등에 의해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됐다. 이 직위는 1895년 의병항전을 개시한 이래 집요하게 전개해온 항일투쟁의 공훈에서 비롯된 것으로, 바로 유인석의 항일투쟁의 대단원에 해당한다.
유인석은 이때 ‘통고13도대소동포(通告十三道大小同胞)’라는 포고문을 반포, 전국민이 일치단결해 최후의 항일구국전을 벌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13도의군이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개시하기도 전인 1910년 8월에 ‘경술국치’로 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더욱이 일본이 러시아에 대한 외교적 교섭을 통해 이곳의 항일운동에 일제 탄압을 가하자 13도의군은 와해되고 이에 무력항일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모든 지사(志士)와 사우(士友)들은 국내에 머물지 말고 간도로 건너와 함께 수의(守義)해야 한다”며 ‘수화종신(守華終身)’할 것을 주장했다.
그 자신도 연해주를 떠나 1914년 3월 서간도의 봉천성 서풍현(奉天省西豊縣)에 정착하는 제3차 망명을 단행했다. 그리고 얼마 뒤 관전현 방취구(寬甸縣芳翠溝)로 옮겨 그 곳에서 죽었다.
이와 같이, 유인석은 일관해 ‘위정척사’·‘존화양이’ 정신에 입각, 철저하게 수구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적극 항일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 유관순도 고흥유씨
유관순의 본관도 고흥(高興)이며, 중시조 유습 장군의 17대손으로 1902년 3월 15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현재 병천면 용두리 지령부락)에서 아버지 유중권씨와 어머니 이소제 여사의 5남매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3.1운동으로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13일 기차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했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했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3,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해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됐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됐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면서 “나는 죽일 수 있어도 우리나라 독립은 막을 수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목숨을 거두셨다.
유관순 열사의 장례식은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거행됐고, 해방 후 천안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됐으며,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매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일문구의사 추모
청일전쟁(1894)에 이어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반도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해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7조약에 이어, 1907년 8월1일 한국군의 강제해산을 강행했다.
이에 유습장군의 후예인 이 지역에 거주하는 유치복은 더 이상 일제의 만행을 좌시할 수만은 없다고 판단하고 의병활동에 투신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을 조달했으며 전라도 충청도 일대에서 적과의 교전에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 1908년 의병대장 유지명의 지시로, 의병이라 자칭하면서 닥치는 대로 민간인을 데러 강간하는 등 민폐를 일으키며 의병의 명예를 크게 훼손시킨 윤병오를 운서면 대치리에서 총살했다. 유치복은 1910년 금마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총살형에 처해서 순국했다.
1905년 일제의 책동에 의해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일제는 청일전쟁에 이어 노일전쟁에서 승리해 한반도에서의 국제적 우위를 점하게 되자 한반도 식민지 전략을 노골적으로 추진 경제적 침탈에 의분을 느낀 이곳 완주군 비봉면 고흥유씨 청년인 유태석과 유영석, 유명석, 유준석, 유현석, 유연청, 유현풍, 유연봉 등은 일제의 야욕을 분쇄코자 결의하고 의병의 군자금 모금에 진력했으며, 의진이 해산되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던 중 이러한 사실이 적에게 알려져 일경에 체포됐고 유태석은 15년형, 유영석은 10년형, 유명석은 15년형, 유준석은 15년형, 유현석은 12년형, 유연청은 12년형, 유연풍은 12년형, 유연 봉은 1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유치복은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 나머지 8명은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건국훈장은 1등급 대한민국장, 2등급 대통령장, 3등급 독립장, 4등급 애국장, 5등급 애족장으로 구분한다.
▲유습장군 개선행렬행사 매년 재현
고려·조선 시대의 무신 유습 장군의 묘가 조성된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에서 지역 이성식 씨 등이 중심이 돼 유습 장군의 개선행렬행사가 매년 재현되고 있다.
대마도를 정벌한 유습 장군 개선행렬과 세종대왕 교지하사 전수식 재현, 두레 풍물패 합굿, 귀농, 귀촌인들과 함께하는 지역주민 음식 나눔행사 등을 함께하고 있다.
완주군 비봉면은 내월리 5개 마을 달이실 합굿축제추진위원회와 달이실 풍장패가 공동으로 주관해 비봉면 달이실 공원에서 매년 재현한다. 달이실은 내월리의 옛 이름으로 유습 장군은 세종 원년 대마도 정벌에 참여한 좌군도 절제사를 지냈다. 류 장군의 묘가 조성된 내월리 주민들은 매년 유습 장군의 개선행렬을 재현해 오고 있다. 또 내월리 주민의 전통인 두레 풍물 겨루기 대회에서는 비봉, 화산, 봉동, 용암, 누리 풍물단 등 5개팀이 참여해 합굿경연대회를 실시, 볼거리도 함께 하는 지역축제 화하고 있다.
▲국민참여 기념사업으로 선정
(사)일문구의사선양사업회 일문구의사 추모 사업이 최근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회 ‘국민참여 기념사업’에 선정했다.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한 가문에서 9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된 것을 기념하고 순국선열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열리고 있는 일문구의사 추모사업이 살아 숨 쉬는 역사로서 큰 의미가 있다”면서 “국민참여 기념사업으로 선정하고 이를 인정하는 인증서와 벽시계 등 기념품을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아울러 매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일문구의사 추모제를 열고 있다.
유희태 이사장은 비봉지역의 한 문중에서 “항일 애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 9명 의사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행사가 인증까지 받아 매우 기쁘다”면서 “일문구의사 선양사업회를 통해 독립운동을 했던 투사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후손들에게 겨레사랑의 마음을 갖게 하도록 노력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