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향(梅香)에 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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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梅香)에 취해
  • 백승록/시인ㆍ수필가
  • 승인 2013.03.2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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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보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얼어붙었던 얼음이 녹으면 눈 녹은 물이 불어나 시냇가의 버들개지가 새움으로 솟는다. 이어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나고, 새들이 매혹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새 둥지를 튼다.
  봄꽃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향긋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매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매화는 생명기운이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피는 미덕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사시사철 피어나는 수많은 꽃이 따라올 수 없는 향기까지 갖추었으니 꽃 중의 꽃이라고 할만하다. 매화의 향기는 깊고 은은하며 진하지 않으면서도 오래가고 멀리 간다. 그러기에 옛 선조는 지루하고 힘든 겨울의 끝에 포근한 생명기운을 기다리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매향을 좇아 산골을 뒤지기도 했다. 이른바 ‘탐매도’라 하여 산모퉁이에 서 있는 고매(古梅) 한 그루를 찾아 몇 날 몇 밤을 찾아가 만나는 그림이 그것이다.

  요즘 세상에 옛 선조의 그러한 운치를 경험해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몇 해 전부터 ‘매화 바람’이 불어 매화도 이제 ‘대량생산’을 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매화상업주의 바람을 일으킨 진원지가 섬진강변 전남 광양 다압면 일대 매화농장들이다. 이곳엔 일본강점기 때 들여온 개량매화('왜매'라고도 한다)가 주류를 이룬다.
  지금 봄을 알리는 매화가 절정이다. 잔설에 기대어 청결하고 고귀한 다섯 잎 백자기를 의기양양하게 펼쳤다. 매화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외로운 용자이다. 삼동(三冬)의 시련을 인고한 희망의 선구자이다. 충성ㆍ절개ㆍ지조ㆍ은일(隱逸)같은 존재로 자리매김 된 것이 매화다. 그러기에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로 사랑받는 학식과 인품을 겸비한 사군자가 아니던가.
  매화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옛날 중국 산동지방에 용래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 청년이 혼기가 되어 이웃마을 예쁜 처녀와 결혼했다. 그런데 이들의 행복을 시기한 야속한 운명이 찾아왔다. 그만 용래의 아내를 영원한 곳으로 데려간 것이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식욕을 전패한 용래는 아내의 무덤에서 슬피 울며 나날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의 무덤에서 한그루의 매화가 발견되었다. 용래는 매화가 아내라 믿고는 자기 집 마당에 정성스럽게 옮겨 심었다. 이후 용래도 세상을 떠났고, 죽어서도 아내를 잊지 못한 용래는 휘파람새로 환생되었다. 휘파람새는 매화나무를 떠나지 않았다는 전설이다. 매화의 꽃말은 용래의 고결한 마음을 붙여 ‘고결’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요즈음 화폭에 담겨있는 매화에 앉아있는 새가 휘파람새라 한다.
  또 하나, 퇴계선생이 전남 담양 재임시절 애뜻한 사랑이 엉킨 매화와의 일화다. 선생은 일 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담양을 떠나야 했다. 그분은 함께 하였던 관기 두향과도 이별의 날이 온 것이다. 떠나는 군수에게 두향은 아쉬운 이별의 선물로 매화분을 드렸다. 그 후 두향은 선생이 세상을 하직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관기에서 벗어나왔다. 선생 재임시절에 함께 자주 찾아 거닐었던 남한강변에 움막을 짓고 남은여생을 홀로 보냈다 한다.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의 애뜻한 사랑의 표현이 매화에 비유되고 있다.
  예부터 문인들은 꽃을 보면 아름답게 노래하고 싶어 했다. 특히 매화에 대해서는 표현할 수 있는 애착의 시어는 모두 읊어버린 터라 후세인 우리는 예찬하고 싶은 노랫말이 없을 정도다. 지금은 그냥 선인들의 표현을 흉내 낼 뿐이다. 사랑받는 매화의 존재가 얼마만큼 대단하였는가를 간접으로 말해주고 있음이다.
  설한(雪寒)의 시련을 딛고 눈꽃처럼 피는 매화, 에이는 칼바람 가르고 은은한 향기로 희망의 싹을 터트리는 매화를 보면 내 가슴에도 꽃망울이 터진다. 일생이 차가워도 향기는 팔지 않는다는 매화, 청결하고 결백한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화가 지금 절정에 이르고 있다.
  봄이 무르익어가는 3월 하순, 매화꽃잎사이로 푸른 달빛이 흐른다. 거울 속 같은 마당으로 불려나간 내 그리움이 서정에 감겨 서성인다. 홀로 흐르고 있는 매향을 가냘픈 내 숨결로 만져본다. 떠난 눈꽃이 훈풍에 날아와 달빛에 피어난다. 매화가 미소 짓는 희망찬 새봄을 맞이하여 우리도 매실 같은 소중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씨앗을 뿌리면 어떨까.

 백승록/시인ㆍ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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