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 죽당 신유의 해사록과 일본 본연사의 시(詩) 』
2018-01-02 신인식 기자
신유(申濡 1610~1665년)는 고령신씨 신말주(申末舟)의 7대손으로 청(淸)나라에 2회, 일본에 1회 사신으로 다녀온 아주 드문 외교관으로 그때마다 기록을 남겼다. 27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30세에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瀋陽)에 갔던 기록이 심관록(瀋館錄)이다. 34세에 5차 통신사(1643년)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해사록(海?錄)을 남기고, 43세 되던 1652년에 사은부사로 북경에 다녀오면서 연대록(燕臺錄)을 기록하였다. 외국체험을 바탕으로 한 문학은 신유의 작품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애도막부에서 1641년 9월에 쓰시마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후계자를 낳았다는 소식과 함께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정에서는 1643년 1월 6일에 병조참의 윤순지를 통신상사로 임명하고, 전한 조경과 이조정랑 신유를 각각 부사와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일본은 당시 조선의 문장을 경모하였으므로 재능과 지혜가 뛰어난 자가 아니라면 사행으로 갈 수 없었다. 신유의 연대록에 실린 시『病起覽鏡 走筆書?』병이 난 후 거울을 보며 붓을 휘둘러 뜻을 표현하다. 에서도『倭國遣使 稍選文翰』왜국으로 파견한 사신은 문학을 선택하였다. 라고 자부했으니 신유의 문장이 뛰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유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종사관으로서 한묵(翰墨)으로 우호와 교류를 이루는 것이 이번 사행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신유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본 측 문인들과 많은 시를 주고받았다.
신유는 또한 일본 통신사행이 일종의 가문 전통의 계승이라고 생각하였다. 선조 신숙주가 1443년 사정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남겼기 때문이다. 통신사 사행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동안 주변수령들이 지대(支待)를 하였는데, 안동 풍산역에서는 친척인 영천군수 신속(申?), 안기 찰방 신형(申瀅)이 접대 하였다. 이모임을 그림으로 그린듯한데 풍산족회도(?山族會圖) 그림은 확인되지 않고 서문만 죽당집(竹堂集)에 남아있다. 신숙과 신형이 보한재집 한질을 주면서 성년에 문명이 뛰어나 선조의 사적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자, 신유 자신도 통신사행이 가문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가문 전통의 계승의식이 신유의 통신사행 내내 작용하였다.
신유가 접촉한 일본문인은 주로 하야시 부자인데 해사록에 하야시 부자와 수창한 한시 3수가실려 있다.
이들의 문학교류의 내용은 주로 한시 수창과 정보수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들이 수창한 시에는 제화(題畵), 신유와 신숙주의 사행, 화려한 일본 풍경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신유는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 하야시 집안 부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고반마이 답장에 그 내용이 보인다.
신유는 8월 5일 순사이, 고반마이와 만나서 일본의 인물, 산천, 식물, 동물, 명절, 관혼상제 등을 차례로 써서 그들에게 보여주며 이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고자 했다. 8월 6일 귀로에 오르니 에도에 남은 지사 이장생(李長生)을 통해 전해달라고 했다. 고반마이는 부친과 상의한 후 형 순사이와 함께 차례대로 간단하게 서술하여 신유에게 주었다. 비록 시간제한으로 인해 자세히는 써주지 못했으나 대개 그 상황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여암 신경준의 글에 의하면 증조부 신유는 그 들로 부터 총 3권의 책을 받았다고 했다. 이는 당시 나라에서 금지한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하야시 부자는 신유의 마음을 얻었다.
죽당 신유의 작품 중 해사록(海?錄)은 1643년 2월 10일부터 9개월 동안 지은 시집으로 한국 측에서 신죽당해사록 상(申竹堂海?錄上)과 신죽당해사록(申竹堂海?錄) 2건을 일본측에서는 본련사조선통신사시서(本蓮寺朝鮮通信使詩書)에 신유(申濡)의 기록 1건도 신청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자랑스럽게 등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