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비리 차단 명분 치안현장 붕괴

최경식 장수 주재기자

2026-08-04     최경식 기자

 

“거주 문제에 자녀 교육까지 꼬이는데, 제복을 입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향피제가 강행되면 미련 없이 명예퇴직 신청서를 낼 생각입니다.”
전북경찰청 소속 A 경감의 씁쓸한 한마디는 현재 일선 현장이 느끼는 절망감을 그대로 대변한다. 수십 년간 지역 구석구석을 훑으며 우범지대를 파악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쌓아온 베테랑 경찰관들이, 정부의 일방적인 ‘향피제(鄕避制)’ 추진 앞에서 계급장을 내려놓을 고민을 하고 있다.
토착 비리 차단이라는 명분은 그럴싸하다. 그러나 현실을 들여다보면 득(得)보다 실(失)이 압도적으로 크다. 경찰청 수뇌부는 뒤늦게 “강제 전출은 사실무근”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뿌리 깊게 박힌 현장의 불신을 거두기엔 역부족이다. 구체적인 주거 지원책이나 현장 소통 없이 정책을 던져놓은 순간, 일선 경찰관들은 이미 ‘잠재적 비리 사범’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숙련된 치안력의 이탈이다.
경찰 조직의 허리이자 현장 대응의 핵심인 경감·경위급 베테랑들이 주거 불안과 생활권 침해를 견디지 못하고 줄사표를 던진다면, 그 공백은 온전히 미숙한 치안 서비스로 이어진다. A 경감의 말처럼 명예퇴직을 선택하는 숙련 인력이 늘어날수록, 치안 현장의 노하우는 순식간에 공중분해 된다.
과거 수차례 추진됐다 실패로 끝난 역사만 보더라도 답은 명확하다. 관할 지역의 지리감과 주민 특성을 파악하는 데만 수년이 걸린다. 지역 사정에 어두운 경찰관들로 채워진 치안 현장에서 강력범죄나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과연 골목길 사정을 잘 아는 베테랑만큼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응할 수 있겠는가. 결국 탁상행정이 불러온 치안 역량 후퇴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리 근절을 반대할 명분은 없다. 하지만 빈대를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일부의 비리를 막겠다고 전체 일선 경찰관의 사기를 꺾고, 사명감으로 버텨온 베테랑들을 거리로 내몰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차별적인 강제 순환근무가 아니다. 비리 발생 고위험 보직에 한정한 핀셋형 인사 검증과 내부 감찰 시스템의 실효성 강화다.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정책은 결코 성 공할 수 없으며, 제복 입은 영웅들의 사기를 짓밟고 얻을 수 있는 안전한 사회는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