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홀대, ‘더 이상 정권창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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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홀대, ‘더 이상 정권창출 없다’
  • 엄범희 기자
  • 승인 2009.06.1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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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안 한나라당 전북도당 위원장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목 가운데 하나가 줏대다. 다시 말해 신념이고, 주관이다. 특히 나라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정치인들은 일반인보다 더 줏대 있는 자기 색깔을 필요로 하고 있다.


불모의 당이고, 누구도 쳐다보지도 않는 당이지만 오직 지조와 신념으로 한길만을 걸어온 정치인이 있다. 정치입문에서부터 30여년동안 무시와 비난을 참아내며 좌초직전에 당을 반석위로 올려놓은 김경안 한나라당 전북도당 위원장(52)이 바로 그 주인공.

그는 정치적 신념인 ‘민심을 외면한 정권과 정당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신주(神主)처럼 간직하고 있다.

한나라당 이명박 정부가 열린우리당 노무현 참여정부를 무너뜨리고 대승을 거두며 정권교체의 꿈을 이룩한 것도 민심을 외면한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반면 한나라당에는 국민이 편안하게 잘사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국민적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였다.


대선당시 젖 먹던 힘까지 바쳐가며 정권창출을 위해 헌신했지만 그는 요즘 한나라당 전북도당이 뭘 했는지 고민에 쌓였다. 대선 당시 당선인뿐만 아니라 당 대표 등 중앙당 인사들이 전략지역 가운데 하나인 전북 몫으로 비례대표 두석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구하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중앙정부 자리에 임명되지 못했다.

그가 화살을 중앙당에 겨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앙당의 호남호(湖南號) 홀대에 대한 강력히 저항의 표시다. 1597년 9월 16일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울둘목 해전(명량해전)승리는 겨우 12척의 수군으로 빠른 판단과 총력 행동의 역동적 투지와 신념을 소유한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경안 위원장은 누가 뭐래도 열악한 한나라당 전북도당의 수호자였고, 정권창출에 선봉에 섰던 일등공신이다. 열린우리당 대선 후보의 아성인 전북을 일당백의 투지와 신념으로 극복한 장수였다. 철저히 매도당하는 야당 불모지에서 야당 정치인으로 산다는 것은 험난하고도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전북도당을 지켜낸 파수꾼이자 기둥 중에 기둥 역을 톡톡히 해냈다. 그런 그가 국민의 꿈과 희망, 당의 안정과 화합 그리고 호남의 몫을 찾는 일에 좌시할 수 없는 입장이 됐다. 6월 초순에 실시될 전북도당위원장 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김경안 한나라당 전북도당 위원장을 만나 질곡의 삶을 들여다본다.

▶평범했던 공무원 김경안
정읍군 태인면 출신으로 5남 1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남성고와 원광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익산군청 일반직 공무원으로 2년여 동안 근무했다.

익산 왕궁농장 한센인 병 담당을 맡아 이들과 애환을 함께 나누며 지냈다. 남모르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뭔가 해 줄 일이 있는지 찾기 위해 고락을 함께 하며 자주 방문했다. 그는 매주 건강검진(양성, 음성) 등 국가제정지원이 빨리 내려올 수 있도록 중앙에 건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무원 신분으로 한센병 환자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돕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즈음 그는 정치대부(代父)인 조남조 의원을 만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맡는다.

▶조남조 의원과의 첫 만남-정치 입문의 신호탄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던 조남조 국회의원(전지사)을 만난 것은 정치입문의 신호였다. 그는 익산지역구 조직부장과 도당 선전부장, 조직부장, 기획조정실장을 거쳐 1996년 제5대 도의원에 당선됐다. 어어 6대, 7대 등 2006년까지 3선 도의원으로 활동했다.

도정의 잘못된 작은 행정행위가 도민의 혈세를 얼마나 낭비하고 권익을 침해하는 지를 목격하면서 공직자의 자세를 돌이켜 보기도 했다. 그는 유일 야당으로 활동하면서 연말 지방주제기자들이 선정한 베스트 의원에 선정되는 등 철저한 분석력과 창조적 대안으로 회기 마다 지역신문의 1면을 장식했고, 뉴스메이커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지역발전을 위해 지역 언론과 관계기관 그리고 시민단체 등 전문가 집단을 오가며 자문을 구하는 등 활력을 모색했다. 산업경제위에서는 농민들의 복지향상에 무게중심을 뒀고, 중소기업인들을 위해 해외 투자개척단활동도 전개했다. 행자위에서는 주민에게 불필요한 규제 등 조례 제정에 앞장섰다.

문광위에서도 낙후된 교량을 교체하고 보수하는 등 주민의 불편과 대형사고 예방에 역점을 뒀다. 도행정자치위원회 간사, 결산 검사 대표위원, 외교협의회 회장 등을 거쳐 도정에 시시비비를 가려 도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켰다.

그는 5번의 대선과 5번의 총선, 4번의 지방선거 그리고 지방의원 3선, 도당위원장 4선을 경험했다. 현재 호남의 정치대부격인 김덕룡 의원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 당대표로 출마할 때마다 보좌하면서 신의를 지키며 지금껏 변절하지 않았다.

16대 강현욱 전의원의 도움으로 6대 도의원에 출마해 도의회에 입성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입문의 계기를 마련해 준 조남조 의원, 같은 정치노선을 걷고 있는 김덕룡의원, 도의원 출마에 도움을 준 강현욱 의원 등 정치거목을 만나 전북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고사직전의 전북도당 제건 성공
그는 지난 2004년 7월부터 ‘정책과 대안으로 실천하는 도당을 만들겠다’는 기치로 한나라당 전북도당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당시 한나라당 전북도당은 한마디로 고사 직전이었다.

불모의 당이고, 아무도 찾지 않는 도당 책임자를 맡으면서 회한도 많았다. 하지만 한번 꿈이 되어버린 정치적 완성의 결과도 보기 전에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가장 먼저 당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 당 조직을 새롭게 정비했다. 괄시받는 한나라당을 구하기 위해 인내하며 오늘을 견뎌내고, 내일을 기약하며 도당분위기를 바꿔갔다.

강력한 추진력, 카리스마, 그리고 한나라당에 대한 애정으로 체계를 새우고 당원배가운동을 벌이는 등 도당 재건을 위해 밤잠을 설쳤다. 이어 도정에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실행에 옮겼다.

전북지역 예산확보에 발 벗고 나섰고, 시민단체와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했다. 정치인들의 선거기간 연래행사로 끝나 버리는 새만금 사업에도 새만금발전방향에 대한 세미나를 여러 차례 개최 하는 등 혼신의 정열을 쏟았다.

▶새만금·무주태권도 공원 특별법, 인수공통감염병연구소 등 적극 앞장
한나라당 전북도당이 도민들을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2005년 새만금 예산 500억이 삭감되자 강현욱 지사의 긴급 요청으로 중앙 당 대표 등을 직접 만나 500억을 다시 살려내는데 핵심 역할을 해냈다.

그해 야당 당대표가 새만금에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는 여론이 일자 다시 중앙당 대표를 만나 전북의 최대현안인 새만금사업단지 방문을 요청했다. 이때 물막이 공사 300억이 부족했고,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300억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새만금특별법도 범 당원대회를 개최하는 등 숨은 공로자다. 처음으로 당 대표를 전북으로 모셔 직접 도당에서 서명까지 받아냈다. 그는 새만금 발전방향과 도민의 역할이란 주제로 정책세미나도 다수 개최했다.

무주태권도 공원 특별법도 그의 손 떼가 묻어있다. 그가 현장의 목소리를 중앙당에 전달해 신속하게 앞장설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수공통전염병 연구소 역시 전국 최초로 전북대학교에 유치했다. 강재섭 당대표가 정읍을 방문해 브르셀라병을 보고받았지만 도당에서 강력히 올인해 전북유치라는 기적을 일궈냈다.

당시 강원도와 경북 등이 연구소 유치를 위해 노력했지만 강재섭 당대표가 자신의 지역구를 물리치고 전북에 유치키로 하면서 당원들에게는 성취감을, 도민들에게는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인수공통전염병 연구소는 세계최대 규모로 만들어진다. 전북대는 강재섭 대표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18대 대선, 잠 못 이루는 총력전
그의 유세능력은 남다르다. 도내 어떤 국회의원 연설보다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다. 당시 14개 시군에서 도당위원장 연설 요청이 쇄도했다. 탁월한 언변능력으로 각 시군을 돌면서 설득하고, 당 입장을 설명하고, 사회단체 기관 등에 후보의 도움을 요청하는 등 대선에 미쳐 있었다.


그는 새벽 6시에 나와 평화동 네거리 유세를 시작으로 저녁 10시에는 핵심당직자와 전략회의를 가졌다. 오늘 전략과 비교해 다음날 전략은 어떻게 새워야 후회 없는 선거를 치를 수 있을지 거듭 고민했다. 그는 밤 12시가 넘어서야 게슴치레한 모습으로 도당사무실을 나섰다.

주요 당직자들도 누구하나 알아주지 않는 야당 10년 세월이 바뀌기를 바라며, 희망과 기대 속에 선거운동에 동참했다. 중앙 지원은 전혀 없었다.

조남조·유홍렬·오양순 선대위원장을 비롯해 서세일 수석부위원장, 이영국, 김효성, 김성수, 박종균 등 각지역당협위원장, 주요당직자, 도당 핵심당직자 등 야당의 서러움을 이겨내며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다.당시 그는 한나라당 전북도당 총괄 본부장을 맡아 언론, 조직, 정책, 유세 등 ‘일당 백 정신’으로 10%에 가까운 득표를 얻어내는데 공헌했다.

이같은 결과는 열악한 도당을 이끌면서 얻어낸 값진 노력의 결과였다. 전북지역 한나라당에 대한 3%대 지지도에서 10%대로 끌어 올라온 것은 기적 같은 일로 도민들에게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그는 대선을 통해 호남에 예산이나 정책이 더 많이 이뤄질 수 있도록 앞장 서야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총선에서도 정당 지지도 10%를 유지한 것은 약진과 함께 희망을 보여줬다. 통합민주당 아성인 전북은 야당 가운데 야당 지역이었지만 온갖 설움과 조롱을 이겨내며 일궈낸 감동의 순간들이었다.

▶손에 땀범벅이 되며 초조했던 18대 대선 개표일
싹쓸이의 척박한 땅, 전북. 불모지인 전북지역에서 당원들의 정권교체 열망은 누구보다, 어느 지역 보다 강했다. 개표일 저녁 6시께 설레임에 상기된 전주시 경원동 도당 사무실에는 하나둘씩 모여든 당원들이 순식간에 자리를 메워졌다. 수고하셨다는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출구조사 결과를 기다렸다.

초조해 하는 당원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했고 여론조사 결과는 한나라당의 완승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10년동안 구겨진 야당 정치인들이다보니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슴을 조이기만 했다. 마치 자식 걱정하는 아버지의 심정과 같았다.

지난 10년동안 힘든 고난의 야당생활, 그것도 13대 총선이후 불모의 당이 되어버린 전북지역에서 한나라당원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이방인들에 불과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듯이 정권교체는 국민의 손으로 이뤄졌고, 호남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대선 이후 멀어진 비례대표 자리
이젠 희망의 열매만 남았다. 도민을 비롯해 당원 동지들은 불모지 전북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배출 될 것이라는 희망에 감격의 순간들만 기다리고 있었다.

대선당시 중앙 주요당직자들이 방문할 때 마다 전략지역 30%배정(전남2명, 광주2명, 전북2명)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례대표 발표 결과는 의외였다. 약속은 하루아침에 깨지고 말았다. ‘역시, 한나라당은 전북에서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정당’이라는 도민들의 원성와 당원들의 실망감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곳저곳에서 버스를 대절해 중앙당에 항의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저항을 잠재웠다. 이미 발표된 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물 건너 갔지만 다른 자리라도 메신저 역할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이 뇌리를 짓눌렀다. 전북과 중앙의 가교역할을 누가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배신감마저 들었다.

당원당규에도 비례대표 30%를 전략지역 배정으로 규정하고 있다. 도민들의 한나라당에 대한 실망감과 허탈감, 그리고 당원들의 중앙당에 대한 원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도가 원망으로 바뀌어 감을 느꼈다.

더 이상 중앙 당직자들의 감언이설이나 속임수는 통하지 않았다. 몸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투쟁하는 길밖에 없었다. 도민의 한을 어떻게 풀어주며, 다음 대선에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 지 난감했다.

▶한(恨) 많은 도당위원장 불출마 선언
그는 이번 6월 초에 실시되는 한나라당 전북도당 위원장 선거에 나서지 않는다. 더 이상 호남민이나 당원들에게 한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서다. 그는 일부 중앙당직자들의 편협된 시각과 호남 홀대를 두 눈뜨고 지켜만 볼 수 없고 호남의 미래를 챙기는 중앙당직자들과의 투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앙당직자들의 약속만 믿고 또 다시 무한정 기다린다면 영원히 호남의 미래는 먼 이웃 잔치에 불과했다. 그는 호남 몫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중앙당에 뛰어 들어 호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꿔기 우해 투쟁하기로 멈먹었다.

한나라당 호남지역 3%대 지지가 10%대를 넘어서면서 호남을 대변할 수 있는 정당임을 보여줄 각오다. 지역에서 안주하고 정책적으로 도민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이제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전국 16개 시·도 가운데 4번 도당위원장을 맡은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는 편한 길도 있지만 젊은 청춘을 한나라당에 바쳤고 더 이상 안주하다가는 호남인에게 죄를 짓는 결과가 나올 것은 불보 듯 뻔 했다. 당당하게 호남의 제 목소리를 내고 호남에서 새로운 뿌리를 내리기 위해 힘들고 고난의 길이지만 당당하게 걷기로 했다.

호남에 대한 중앙당의 오만한 시각이 바꿔지는 그날까지 투쟁할 계획이다. 그래서 새만금의 원활한 추진, 여수 엑스포, J 프로젝트, 광주세계문화도시 조성 등 호남지역 대형국책사업들이 잘 추진될 수 있도록 정책이나 예산확보 등을 단단히 챙길 계획이다.

▶가정에는 언제나 미안한 가장
항시 미안한 대상은 부인이다. 정치인으로서 월급한번 재대로 챙겨준 일이 없어 죄스럽다. 오랜 세월을 가계로 고생시키고 아직도 묵묵히 가정을 위해 희생해 주는 부인을 보며 감사와 위로를 보낸다. 부인의 재정지원 덕택에 김 위원장은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빗나가지 않고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의연하게 성장해 준 아이들 또한 고맙기만 하다. 대선 당시 휴가차 나온 아들이 대선 유세장을 찾아와 연설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정치 입문을 잘하셨다며 저도 돕고 싶다고 말했을 땐 대견함 마저 들었다.

효자로도 소문이 자자하다. 익산 영등동에 계신 아버님 김기태(82)씨를 주말마다 찾아 인사하고 문안드리며 주변 이웃으로부터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백제 예술대와 벽성대학 평생교육원 외래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국가정책 방향이나 전북 현안 사업, 학생들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는 강의를 하고 있다.

김경안 위원장은 “도민들에게 한나라당이 미래를 대표하는 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미약하나마 정치역량도 바칠 각오다”고 말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최영일 여사(51)와의 사이에 김주리(25. 영국어학연수중), 김준현(23.경희대경제학과) 1남 1녀를 두고 있다./엄범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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