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택한 5·18 피해자의 '마지막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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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택한 5·18 피해자의 '마지막 편지'
  • 투데이안
  • 승인 2010.09.1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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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아들 한명, 망령(亡靈)의 자식을 도와주세요."

26년을 버텼다. 피붙이가 없었다면 더 일찍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5·18민주유공자인 지모씨(56)의 비극적인 삶은 1980년 5월21일 전남 목포경찰서 철문을 들어서면서 예견됐다.

'군부정권 타도'를 외치며 목포거리를 활보한지 사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눈을 붙이기 위해 여관에 투숙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수사관 4명이 들이닥쳐 지씨를 끌고 목포서 지하실로 데려갔다. 그곳에 있던 계엄군과 경찰들은 지씨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곤봉질을 해댔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지만 고문은 8시간이나 계속됐다.

매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목포지산 군부대로 지씨를 끌고간 군인들은 "광주에서 함께 온 사람들을 대라"며 머리에 총을 겨눴다.

곤봉질을 견디지 못한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고, 기절을 세 차례나 반복했지만 의무대 응급처치가 고작이었다.

지씨는 37일 동안의 감금생활에 대해 "하늘과 땅, 조상을 원망했다. 내 생에 가장 치욕스런 순간이었다"고 남겼다.

어렵사리 풀려났지만 '5월 악령(惡靈)'은 지씨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석방된 뒤 고향 여수에서 요양하던 시절 동생을 보기 위해 상경했다가 불심검문 중이던 영등포서 경찰에게 또 붙잡혔다.

주소가 '광주'라는 것이 이유였다. 보름 넘게 두들겨 맞았더니 이번엔 강원도 화천에 있는 삼청교육대로 보내졌다.

4주간의 감금생활이 시작됐다. '불순분자'라며 식수통에 들어가 물고문을 받았다. 피가 섞인 그 물은 460명 교육생들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지씨는 20년 넘도록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몇푼 안되는 5·18 보상금을 받아 2004년 축산업에 투자했으나 불안·우울·불면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편지지 20장 분량의 유서를 남기고 지난 14일 광주에서 극약을 마셨다.

같은날 5·18 구속부상자회에 도착한 유서에는 "하나 뿐인 아들을 돌봐달라"는 지씨의 간절한 부탁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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