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응당 답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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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응당 답 아냐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0.08.19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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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진 방송·영화·문학평론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으로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새 한 달이 됐다. 
2017년부터 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 큰 충격이 슬픔과 함께 휘몰아쳤다. 

박원순이 인권변호사로 출발해 시민운동의 아이콘, 3선 서울시장에 더불어민주당 차기 대선 주자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던 유명인사임을 부인할 수 없는 인물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내가 스타나 유명인사 자살에 대한 생각을 쓰는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2008년 10월 2일 만인의 연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최진실이 목맨 시체로 발견됐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나는 뜻밖의 비보를 접하고 ‘죽을 용기로 살지, 그런다고 죽냐’(부천자치신문, 2008년 10월 11일)라는 글을 썼다. 잡지사(월간 수필문학) 편집자가 그 글을 잘 읽었다며 11월호 게재를 요청해왔기에 그렇게 하라고 동의해주었다.
분명한 것은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인간 누구에게도 삶에는 고통과 괴로움, 슬픔과 외로움 등이 따르기 마련이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원래 그렇다. 그럼에도 삶은 축복이다. 아름다운 것이다. 의미와 가치가 충분한 것이다. 죽을 용기로 살면 못 헤쳐나갈 것이 없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죽는다. 대략 그런 요지의 글이다.
그로부터 7개월쯤 지난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고교 교사인 나는 학생들을 인솔해 백일장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개회식에서 사회자가 말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온 국민의 오열과 추모 속에서 끝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을 지켜보고 쓴 글이 ‘주례사 선생님 노무현’(한겨레, 2009년 6월 8일)이다.
임기를 마치고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9월 6일 강금원(2012년 작고) 창신섬유 회장과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 자녀 결혼식이 열린 시그너스 골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례를 서기 위해서다. 
당시 내가 편집인 겸 지도교사로 있던 ‘전주공고신문’ 제작을 위해 갔던 길이었다. 강금원 회장은 전주공고 출신이고, 전 대통령 결혼식 주례는 기사 가치가 충분했다.
거기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나본 일화 등을 소개한 후 갑작스런 서거에 대해 말한다. 
솔직히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에 대해선 잘못이라 여기고 있다. 
삶과 죽음은 엄연히 다를 뿐 아니라 무엇이, 그리고 누가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느냐, 열 번을 생각해도 이미 죽음이 자신 혼자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에 쓴 건 ‘값진 죽음보다 사는 가치가 우선’(전북연합신문, 2018년 8월 1일)이란 글이다. 이것은 2018년 7월 23일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에 대해 쓴 글이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영결사에서 “당신은 항상 시대를 선구했고 진보정치의 상징이었다”며 “당신은 여기서 멈췄지만 추구하던 가치와 정신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노회찬 별세는 값진 죽음이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러면 뭐하나. 어떤 값진 죽음이라한들 사는 가치를 우선할 수는 없음인데…. 
그가 남긴 유서에 따르면 드루킹측으로부터 받은 4,000만 원에 대해 ‘어리석은 선택’이라 했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당원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자책했지만, 그렇게 자살해 ‘죽을 짓’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의 극단적 선택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다.
그렇다면 수 억, 수십 억 검은 돈을 받고도 정치 탄압 운운하거나 뇌물이 아니라며 손사래치는 범법자 등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사람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선택’은 따로 있다. 말할 나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니 자신은 맘이 편할지 몰라도 살아있는 자들에게 너무 무책임한 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더불어민주당은 ‘피해 호소인’ 표현 따위 등 매우 옹색한 처지가 되지 않았나. 
또 자연사할 때까지 살아가야 할 유가족들은 어쩌겠는가. 그런 게 아니라도 전대미문의 코로나19에 역대급 물난리, 아파트값 폭등 등 부동산 문제와 검찰총장의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쓴 독재와 전체주의 배격’ 발언까지 화두가 된 지금이다.  
설사 죽어 마땅한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응당 답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그런 선택을 했겠느냐는 긍정 내지 동정론이 생길 수 있지만, 그런 생각도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어떤 값진 죽음이라도 사는 가치가 그것보다 우선이라는 점이다. 모두가 그렇게 여기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죽음은 모든 게 끝난 걸 의미한다. 단적인 예로 검찰이나 경찰의 수사 피의자가 숨질 경우 ‘공소권 없음’(검찰사건사무규칙 69조)으로 종결되는 것도 그래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오히려 일파만파 번져나가는 양상을 보여 무책임한 짓의 끝판왕이란 느낌이 가시지 않게 만든다. 어쨌든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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