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 수필가를 회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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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 수필가를 회고하며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1.02.0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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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진 방송·영화·문학평론가

1월 28일 김학(1943~2021) 수필가가 우리 곁을 떠났다. 최근 와병(臥病) 소식을 들은 바 없는데다가 개인적으로 각별한 인연이 있는 문인인지라 뜻밖의 비보(悲報)로 다가온다. 79세로 이른바 아홉 수를 넘기지 못한 채 우리 곁을 떠난 김학 수필가이기에 더욱 그렇다.
“장세진 선생, 방금 미국영화 톺아보기 잘 받았습니다. 고맙소이다. 이 원고를 언제 다 썼단 말이오? 대단합니다. 문운창성을 빕니다. 김학.”

이는 지난 해 11월 27일 김학 수필가가 내게 보내온 문자 메시지다. 그 무렵 나의 책 ‘미국영화 톺아보기’를 받아본 문인 41명이 문자·전화·편지 등으로 발간을 축하해주었다. 가장 먼저 김학 수필가가 축하 문자를 보내왔다. 그만큼 반가워 했던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사실 김학 수필가는 나의 고교 선배다. 그 사실을 알게된 건 1983년 여름이다. ‘TV문학관의 허실’이란 드라마평으로 서울신문사 ‘TV가이드’가 주최한 제2회방송평론공모에 당선된 직후였다. 김학 수필가는 “방송평론가로 데뷔한 걸 신문에서 보았다, 고교 후배가 자랑스럽다”며 내게 연락을 해왔다. 당장 ‘전북수필문학회’며 ‘전북문인협회’ 가입을 권유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전북수필’ 제13호(1983.11.30.)에 수필을 처음 싣는 등 동인 활동에 들어갔지만, 그러나 나는 이듬해 전남 강진으로 신규교사 발령을 받고, 전주를 떠났다. 1987년엔 구례여고로 발령받아 남원으로 이사해 버스 통근을 했다. 마침 김학 수필가는 KBS 남원방송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남원지역 문인 모임에 나가게된 이유다.
김학 수필가는, 이를테면 나를 지역문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길을 열어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은사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경기도 평택기계공고 근무할 때인 1992년 5월 30일 나는 그의 수필집 ‘호호부인’ 출판기념회 시간에 맞춰 내려오기도 했다. 나는 이후 약 9년을 객지에서 근무하다 1993년 3월 고향인 전북으로 학교를 옮겼다.
라대곤(1940~2013) 소설가 겸 수필가를 처음 만난 것도 김학 수필가 덕분이다. 김학 수필가가 1995년 가을 어느 날 내장산에서 문인 모임이 있는데, 참석할 거냐고 전화를 해왔다. 그 자리에서 김학 수필가가 고교 후배라며 소설 쓰는 라대곤 회장에게 나를 소개시켜줬다. 이후 나를 무한 예뻐했던 라대곤 소설가와의 인연을 맺어준 것이다.
아무튼 그런 교유로 김학 수필가는 1999년 나의 책 ‘한국영화를 위함’ 출판기념회에서 축사를 해주기도 했다. 무릇 교유란 오고 가는 것이어서 김학 수필가의 3남매 결혼식(2002~2005)은 물론 모친·장인상(2007) 등 애경사를 빠짐없이 챙기는 그런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뿐이 아니다. 김학 수필가는 내가 1983년 방송평론가에 이어 1985년 영화평론가, 1989년과 1990년 문학평론가 등 신인상 수상 이후 처음으로 문학상을 받게 앞장서주기도 했다. 1998년 제2회전북예술상(2010년부터 전북예총하림예술상)이 그것이다. 당시 전북문인협회장이었던 김학 수필가가 내게 공적서를 내라 했고, 그 추천으로 문학부문 수상자가 된 것이다.
물론 그 한 해에만 5권의 저서를 펴내는 등 나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던 터다. 그럴망정 아무리 열심히 활동을 해도 상 줄 곳에서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이 아니던가? 김학 수필가를 고마운 멘토로 회고하는 이유다.
한편 내가 김학수필론을 쓴 건 두 편이다. 초기 수필집 ‘철부지의 사랑 연습’(1982)과 ‘춘향골 이야기’(1986)를 대상으로 한 ‘일상적 이야기의 문학성’(‘전북문단’ 제5호, 1989.12.20.)에서 “김학의 작품은 오늘날 이 땅의 수필문학이 안고 있는 ‘서러움’을 쾌척해주는 문학적 감동을 획득, 수필다운 수필의 진수를 어느 정도 보여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오수 땅, 오수 사람들’(1999)론인 ‘문학으로서의 수필’(수필과비평, 2002년 1·2월호)에서는 “무엇보다도 김학 수필의 미덕 내지 강점은 문학으로서의 수필이라는 점이다. 문학으로서의 수필에 값하는 첫 번째 요소가 표현 내지 정확한 문장이다. …김학 수필이 문학으로서의 수필에 값하는 두 번째 요소는 일상적 이야기를 늘어놓되 단순한 나열로 그치지 않는 점이다”고 썼다.
198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손가락이 바쁜 시대’·‘지구촌 여행기’ 등 수필(선)집 17권과 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 2권을 남긴 그의 족적은 뚜렷하다. 특히 ‘전북수필문학회’ 창립과 전북대 평생교육원·신아문예대학 등에서의 수필 강의 및 지도로 인한 수필문학 저변 확대는 김학 수필가가 평생을 수필과 함께 해왔음을 환기시킨다.
한국 수필문학사 한 페이지를 뚜렷하게 장식할 그런 활동에 걸맞게 김학 수필가는 한국수필상(1987)·전북문화상(1988, 1996년부터 자랑스러운전북인대상)·전북문학상(1992)·백양촌문학상(1994)·신곡문학상대상(1995)·전주시예술상(2003)·연암문학상대상(2007)·목정문화상(2009)·원종린수필문학대상(2018)·전북펜기림상(2020)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나를 유난히 예뻐했던 라대곤 소설가에 이어 김학 수필가마저 내 곁을 떠났다. 어찌 슬프고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모쪼록 김학 수필가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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