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 재구속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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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총수 재구속을 보며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1.02.09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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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진 방송·영화·문학평론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형 확정 재판 나흘 후인 1월 18일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 선고와 함께 피고인을 법정 구속했다. 2년 6개월이면 집행유예도 가능한 형량인데, 재벌 총수 범죄에 대한 이른바 ‘3-5 법칙’(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는 관행)을 깬 판결이다.
재판부가 이례적으로 삼성 쪽에 준법감시위원회 운영을 권고하면서 선처하려 한다는 법조계 안팎의 우려를 낳은 것에 비하면 그와 다른 판결인 셈이다. 어찌 보면 신의 한 수라는 생각마저 든다. 최대한 봐주면서도 빗발칠 수 있는 반발 내지 비난 여론을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는 실형 선고와 함께 법정 구속한 것이라서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의 뇌물 요구에 편승하여 적극적으로 뇌물을 제공했고 묵시적이긴 하나 승계 작업을 돕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사용해 달라는 취지의 부정한 청탁을 했다”며 이 부회장의 86억여 원 뇌물공여·횡령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항소심을 파기하며 인정한 뇌물 액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마필계약서 허위 작성(범죄수익은닉), 국회 청문회에서의 위증도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양형 사유로 반영하겠다’고 했던 준법감시위가 “앞으로 발생 가능한 새로운 유형의 위험에 대한 선제적 위험 예방과 감시까지는 이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에서 양형 조건으로 참작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또한 재판부는 “이 사건은 국정농단 사건의 일부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동안 정치권력이 바뀔 때마다 반복됐던 삼성 최고 경영진이 가담한 뇌물횡령죄의 연장선에 있기도 하다. 실효성 기준에 미흡한 점이 있으나 시간이 흐른 뒤 더 큰 도약을 위한 준법윤리경영의 출발점으로서 대한민국 기업 역사에서 하나의 큰 이정표라는 평가를 받게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여기서 잠깐 안재승 칼럼(한겨레, 2021.1.19.)을 참조해 ‘삼성 최고 경영진이 가담한’ 정경유착의 흑역사를 살펴보자.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5·16 쿠데타 직후 ‘부정 축재자 1호’로 지목돼 구속될 처지에 놓였으나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나 협조를 약속하고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 전신)를 만들었다.
그 뒤로도 이병철 회장의 전두환 뇌물 제공, 이건희 회장의 노태우 전 대통령 뇌물 제공,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차떼기 사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로펌 수임료 대납 등으로 정경유착은 끊이지 않았다. 종국에는 이 부회장의 박 전 대통령 뇌물 제공으로 이어졌다. 삼성을 윽박지른 역대 정권의 죄 역시 가볍지 않지만,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정경유착이 어느 한쪽만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80여 년의 삼성 역사에서 총수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은 것은 이 부회장이 처음이다.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은 검찰의 봐주기 수사,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통해 면죄부를 받았다. 비록 1심 형량인 5년이 반절로 줄었을지라도 다시 구속·수감되는 실형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는 판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공범으로 기소된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사장과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에게도 이 부회장과 같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승마 지원을 위해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와 접촉했던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과 황성수 전 전무에겐 각각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이 부회장쪽 변호인은 “이 사건 본질은 박 전 대통령의 직권남용으로 기업이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당한 것”이라며 “그런 본질을 고려해볼 때 재판부의 판단은 유감이다. 판결문을 검토해보고 재상고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지만, 2년 6개월형이 확정됐다. 변호인이 1월 25일 “이 부회장은 이번 판결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재상고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로써 2017년 2월 구속된 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기까지 약 1년간 수감됐던 이 부회장은 앞으로 1년 6개월 감옥생활을 더 해야 한다. 재상고 포기는 다소 의외지만, “대법원에 사건이 다시 올라가도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이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중론이다.
삼성쪽은 부인하고 있지만, 이 부회장이 특별사면과 가석방 등을 염두에 두고 판결 확정을 서두른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정치권 안팎의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 논의에 선을 그었지만, 이 부회장 역시 형을 확정받고 사면 요건을 충족하는 것이 실리적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부회장이 감옥에서 처음으로 낸 메시지는 1월 21일 변호인을 통해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활동을 계속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다분히 재판부 지적을 의식한 화답적 행보로 보인다. 1년 6개월 다 감옥에 있을지 그 안에 사면을 받아 풀려날지 귀추가 주목되는 대목이다. 분명한 건 이 부회장이 조부나 부친이 살던 시대가 아닌 시절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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