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시인 '봄바람은 弘益을 품었네' 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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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시인 '봄바람은 弘益을 품었네' 출판기념회
  • 송미숙 기자
  • 승인 2021.05.13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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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시인이 “봄바람은 弘益을 품었네”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이승희 시인은 전북대학교 78학번으로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졸업은 87년으로 9년 6개월만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이승희 시인(詩人)은 1980년 5월24일 전두환 계엄사령관에 맞서 광주학살의 진실을 담은 ‘전주시민에게 드리는 글’ 제하의 유인물을 제작했다. 당시 광주에서는 피의 학살과 이에 대한 시민군들의 저항이 진행중이었다. 이 시인은 유인물 초안을 작성했고, 전북대학교 최순희(독어독문학과 78학번, 1992년 작고), 정해동(사회학과 78학번) 등과 제작했다.

유인물은 24일 새벽 4시경 전북대 학생회관 농성장에서 알게 된 50여명에 의해 전주시내 곳곳에 배포됐다.
이 시인은 또한 피의 광주를 탈출해 전주에 온 김현장씨(르포 무등산 타잔 작가)의 “전두환의 광주 살륙작전”이라는 유인물을 담은 두개 트렁크를 전날 한상렬 목사 댁(이 일로 한상렬 목사는 기소되었다)으로 운반했고, 이 중 일부는 최순희, 박영식 등과 함께 전주지역에 배포했다.  
이 일로 이 시인은 전국 지명수배 됐고, 6월9일 체포되어,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됐다. 이 시인은 광주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다음해인 1981년 4월17일 공주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이 시인이 ‘시인이 되기로 한 때’는 17살 때였다고 한다. 시인은 10살 때  작은아버지(전주고 졸업 후 학군후보생으로 소위 임관)께서 강원도 삼척에서 육군 중위로 근무 중 순직했다.
이 시인은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17살 때 작은아버지 유품 중 우연히 읽게 된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서시(序詩)”에 대한 감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詩)들은 1980년 5월 민중항쟁 전후와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5.18민중항쟁에서 이룬 시민공동체 대한 희망과 조국에 대한 시인의 사무치는 사랑” 등이 주된 내용들이다. 
이 시인은 30대와 40대에도 민주화운동을 이어갔고, 1993년에는 내일신문 창간위원이 되어 창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95년에는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전북지부 사무국장을 그만두고, 내일신문에 입사해 기자로서 새 출발을 했다.
그런데 이 시인은 1997년 그토록 바라던 김대중 선생 대통령 당선과 민주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새로운 방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민주정부만 수립되면 광명세상(光明世上)이 올 줄 알았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다고 했다. 심한 허무주의에 빠진 이 시인은 매일같이 모악산 대원사까지 다니면서 내려올 때는 “이놈의 다리 부러져버려라”고 뛰어서 내려오곤 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 시인은 발바닥을 대원사 계곡 바위들이 바쳐주면서 “뿌러져버렸으면 하는 다리”는 멀쩡했다고 한다.  
이후 2001년 12월 초 두 명의 대학교 후배들로부터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 저서 ‘한국인에게 고함’을 선물 받았고, 다음해 1월1일 ‘한국인에게 고함’을 독파했다. 이 시인의 방랑은 여기서 끝이 났다.
‘오래된 미래’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찬란한 선도문화(仙道文化)와 만장일치 화백회의라는 홍익(弘益) 민주주의에서 답을 얻게 된 것이다.
이승희 시인은 “대한민국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세대교체가 아니라 시대정신의 교체입니다. 패권주의, 황금만능주의, 뜬구름같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널리 인간과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정신(弘益精神)으로의 시대정신 교체가 필요합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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