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시인이 “봄바람은 弘益을 품었네”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이승희 시인은 전북대학교 78학번으로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졸업은 87년으로 9년 6개월만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이승희 시인(詩人)은 1980년 5월24일 전두환 계엄사령관에 맞서 광주학살의 진실을 담은 ‘전주시민에게 드리는 글’ 제하의 유인물을 제작했다. 당시 광주에서는 피의 학살과 이에 대한 시민군들의 저항이 진행중이었다. 이 시인은 유인물 초안을 작성했고, 전북대학교 최순희(독어독문학과 78학번, 1992년 작고), 정해동(사회학과 78학번) 등과 제작했다.
이 시인은 또한 피의 광주를 탈출해 전주에 온 김현장씨(르포 무등산 타잔 작가)의 “전두환의 광주 살륙작전”이라는 유인물을 담은 두개 트렁크를 전날 한상렬 목사 댁(이 일로 한상렬 목사는 기소되었다)으로 운반했고, 이 중 일부는 최순희, 박영식 등과 함께 전주지역에 배포했다.
이 일로 이 시인은 전국 지명수배 됐고, 6월9일 체포되어,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됐다. 이 시인은 광주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다음해인 1981년 4월17일 공주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이 시인이 ‘시인이 되기로 한 때’는 17살 때였다고 한다. 시인은 10살 때 작은아버지(전주고 졸업 후 학군후보생으로 소위 임관)께서 강원도 삼척에서 육군 중위로 근무 중 순직했다.
이 시인은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17살 때 작은아버지 유품 중 우연히 읽게 된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서시(序詩)”에 대한 감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시인은 30대와 40대에도 민주화운동을 이어갔고, 1993년에는 내일신문 창간위원이 되어 창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95년에는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전북지부 사무국장을 그만두고, 내일신문에 입사해 기자로서 새 출발을 했다.
그런데 이 시인은 1997년 그토록 바라던 김대중 선생 대통령 당선과 민주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새로운 방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민주정부만 수립되면 광명세상(光明世上)이 올 줄 알았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다고 했다. 심한 허무주의에 빠진 이 시인은 매일같이 모악산 대원사까지 다니면서 내려올 때는 “이놈의 다리 부러져버려라”고 뛰어서 내려오곤 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 시인은 발바닥을 대원사 계곡 바위들이 바쳐주면서 “뿌러져버렸으면 하는 다리”는 멀쩡했다고 한다.
이후 2001년 12월 초 두 명의 대학교 후배들로부터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 저서 ‘한국인에게 고함’을 선물 받았고, 다음해 1월1일 ‘한국인에게 고함’을 독파했다. 이 시인의 방랑은 여기서 끝이 났다.
‘오래된 미래’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찬란한 선도문화(仙道文化)와 만장일치 화백회의라는 홍익(弘益) 민주주의에서 답을 얻게 된 것이다.
이승희 시인은 “대한민국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세대교체가 아니라 시대정신의 교체입니다. 패권주의, 황금만능주의, 뜬구름같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널리 인간과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정신(弘益精神)으로의 시대정신 교체가 필요합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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