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의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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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의 정상화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1.09.3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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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주필

오늘도 이번 주말 ○○사건에 대한 종합 수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란 기사를 본다. 분명 보도된 범죄 혐의가 모두 사실로 확인됐다는 식의 내용일 것이다. 도대체 이런 관행은 언제부터 어떤 연유에서 생긴 것일까? 혹시 군사정권 시절 국가기관이 남파간첩단을 일망타진했다고 자랑삼아 발표했던 것에서부터 비롯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피의사실 공표로 인한 폐해나 부작용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삼고 있지만, 이 같은 수사결과 발표 관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찌 보면 사법부의 최종 판단인 양 수사기관이 단정적으로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야말로 피의사실 공표의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알 권리 차원에서 제한된 범위의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 재판은 물론 기소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확정적으로 사실관계와 죄책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공표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혹시라도 그 목적이 수사기관의 치적을 과시하거나 재판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양질의 증거에 기초한 엄격한 심리도 없이 섣불리 범죄로 단정하고 범죄자로 낙인찍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만약 나중에 무죄로 확정되어 무고한 사람이라 판명될 경우 그 사람의 인생은 과연 누가 책임질 것인가 말이다.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야 할 성폭력 피해자가 외국에 체류 중이라 출석이 지연되고 피고인의 구속 기간 만료가 임박하자 재판부는 부득이 보석으로 피고인을 석방했다. 또다시 비난 여론이 비등하고, 일부 법조인까지도 피고인을 방면한 재판부의 조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이에 동조한다. 법 절차에 따른 합당한 조치인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말도 나올 법하건만 그런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죄질 나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심리도 없이 수사기관이 일방적으로 작성해 온 서류만으로 무조건 중형을 선고해야 한단 말인가? 형사소송법상 엄격한 증거 법칙과 무죄 추정 원칙은 중대하고 극악한 범죄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물론 일반 국민의 법 감정과 건전한 상식을 재판에 반영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오로지 국민 법 감정만을 중시하여 법과 절차를 무시한 채 여론재판을 한다면 이는 문명국가의 재판이라 할 수 없다.
영장심문 기일에 출석한 변호인이 영장이 발부되더라도 법원 결정에 승복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뭔가 어색하다. 승복하지 않으면 도망이라도 가겠다는 것인가? 법치국가에서 법원의 판결이나 결정에 따라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얘기를 마치 크게 인심 쓰듯 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 아닌가?
법원의 판단을 자신의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폄하하고 무시하는 일은 이제 흔한 일이 돼버렸다. 판결문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채 황당한 판결, 수치스러운 판결 운운하면서 비난한다.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음에도 사과는커녕 자신은 정치적 희생양이고 오히려 담당 판사가 정치판사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나 정치적 셈법에 따라 취지를 곡해하고 사법 불신을 부추기는 무책임한 발언이 정상일 리 없다.
이러한 비정상이 일상화되다 보니 국민은 별다른 문제의식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 채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싶다. 분명 문제가 있는 비정상적인 행태임에도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집단 최면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
진정한 법치주의 구현을 위해서는 이러한 비정상의 정상화가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 법과 원칙에 따라 아닌 건 아니라 하고, 법원의 판결은 존중돼야 하며 비판이 아닌 비난이나 공격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하면 된다. 건전한 상식과 지성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가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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