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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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 유감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1.11.03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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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진 방송·영화·문학평론가

10월 26일 제 z첧(1987~1992)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씨가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달리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라 하지 않고 뉴스를 진행하는 방송사 앵커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노태우씨’라고 호칭하는 데에는 물론 그만한 까닭이 있지만, 우선 장례 이야기부터 하자.
장례는 5일간 국가장으로 진행됐다. 국가가 주관하여 장례비용 전부를 지불하는 국가장이라고 하지만, 10월 30일 올림픽공원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유족과 김부겸 총리 등 50명만 참석해 비교적 조촐한 모습이었다. 고인의 당부와 코로나19 상황이 겹친 때문이란 이유가 전해졌다. 고인은 화장을 거쳐 경기도 파주 검단사에 임시 안장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 강제 진압과 12·12 군사쿠데타 등 역사적 과오가 적지 않지만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북방정책 추진,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 등 성과가 있었다”며 추모 메시지를 냈다. 문 대통령의 추모 메시지가 노씨 사망 다음날 나온 것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주재한 참모진 회의에서 노씨 장례 절차와 메시지 수위, 조문 여부 등에 대한 의견을 들은 뒤 국가장으로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 이는 국가장법에 따른 결정이라 할 수 있다. 국가장법에는 ▲전·현직 대통령 ▲대통령 당선인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에 한해 국가장을 치를 수 있다고 규정되어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우가 박탈된 전직 대통령의 국가장 여부에 관한 명확한 규정은 없다. 그동안 뭐했느냐는 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5·6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노태우가 군사반란과 내란죄 등으로 단죄돼 예우가 박탈된 게 1997년이다. 이후 집권한 김대중·노무현·문재인정부 15년 동안 수수방관한 대가(代價)를 톡톡히 치른 셈이라 할까.
아니나다를까 다분히 정무적 판단으로 결정된 국가장에 대해 반대가 빗발쳤다. 조기 게양 및 분향소 설치를 하지 않는 지방자치단체와 장례위원을 고사한 단체장과 교육감들이 속출했다. 국가장 반대 성명서도 잇따랐다. 가령 ‘고문투사모(고문 등 국가폭력에 맞서온 투사들의 전국모임) 1980년 전국총학생회장단 모임’이 한겨레(2021.10.29.) 신문에 낸 성명서가 그것이다.
“학살자, 독재자 노태우의 국가장을 반대한다”란 제목의 성명서 첫 문단은 이렇다. “헌정질서를 파괴한 12·12 하극상 군사반란 당시 전방의 군병력을 동원한 공로로 전두환 신군부의 2인자가 된 노태우는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서 1980년 전국적 ‘민주화의 봄의 꿈’을 좌절시켰으며 신군부 수뇌부로서 5·18 광주양민학살의 주요 책임자였다.”
5·18 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와 5·18기념재단도 반대 성명을 냈다. “노태우는 죽더라도 5·18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죄와 고백, 5·18을 왜곡한 회고록을 교정하지 않은 노씨는 끝까지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재만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는 “노씨는 5·18 진상 규명에 비협조적이었고 공개적인 정식 사죄가 없었다”고 성토했다.
위 내용을 부언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먼저 육군소장 노태우는 12·12때 자신이 사단장으로 있던 전방의 병력을 서울로 이동시켜 전두환과 함께 쿠데타 주도 세력이 됐다. 한겨레(2021.10.27.)에 따르면 광주학살 관련해서도 노씨는 1980년 5월 21일 새벽 발포를 의미하는 계엄군의 자위권(자기보호) 발동이 결정됐던 회의 자리에 전씨 등과 함께 참석했다.
1980년 8월 전씨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이 된 노씨는 희생자 유족 사찰과 분열 유도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노씨는 생전 광주학살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는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저항했다”며 책임을 시민들에게 돌리기까지 했다.
5·18단체가 회고록 정정을 촉구했지만 노씨 쪽은 반응이 없었다. 물론 노씨 가족은 그동안 여러 차례 광주를 방문해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광주 시민사회는 회고록 등을 이유로 그런 사죄를 진정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들을 통해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유언을 남겼다지만, 육성도 없고 진짜인지, 생전엔 왜 못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대학시절 군부독재에 맞서며 수차례 수감생활을 한 운동권 출신 김부겸 총리가 국가장례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고 역사에 기록할 때가 된 것 같다”고 한 말이 맞지만, 친일파 청산에서 보듯 칼 같은 단죄에 좀 무딘, 너무 용서를 쉽게 하는 민족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라 씁쓰름하다. 유감이다.
또 하나 ‘고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에서 새삼 떠오르는 것이 있다. 1987년 6·10 민중항쟁으로 6·29 항복선언을 받아내 직선제 선거를 치르게 됐는데도 야권의 양 김씨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한 사실이다. 만약 그때 김영삼·김대중 후보 누구 1명이 사퇴했다면 오늘 이런 유감의 난리를 목격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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