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과 현대화폐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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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과 현대화폐이론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1.12.16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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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 주필

최근 수개월간의 인플레이션은 경제학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크게 상회했다. 지난 3월까지 2%대의 인플레이션을 전망했던 미국 연준에도 6%를 넘나드는 인플레이션은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공급망 충격이나 에너지 가격 급등이 크게 작용하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작년 이후의 공격적 통화공급과 막대한 규모의 재정부양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채권가격(선물가격 혹은 물가연동채권가격)에 반영된 장기 인플레이션 기대가 여전히 2%대 초중반에서 별로 동요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금융시장도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던 것으로 판명될지 모르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인플레이션이 통제 가능하고 통제될 것으로 믿고 있다는 뜻이다.

그 믿음을 실현시킬 주체로는 여전히 연준이 지목된다. 인플레이션은 결국 화폐가치에 대한 문제이며, 따라서 화폐공급의 독점권을 보유한 연준이 현재의 완화적 정책기조를 바꾸면 인플레이션을 수속(收束)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중요한 논점은, 목표를 상회하는 인플레이션이 지속될 경우, 연준이 정책기조를 바꿀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보다 매끄럽게 물가안정 목표에 도달할 수 있고, 때로는 이번처럼 염두에 두었던 정책경로가 변경될 수도 있으나, 궤도를 벗어나 지속되는 인플레이션은 반드시 연준의 정책대응을 불러올 것이라는 신뢰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연준의 태도는 변화하고 있으며, 내년까지 금리 인상이 없을 것이라는 과거의 입장은 기억에만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에 이르러 조금은 생뚱맞은 상상을 해 보게 된다. 미국 민주당 일각에서 시작되어 세를 불려오던 '현대화폐이론(Modern Monetary Theory)'에 관한 것이다. 정부의 재정적자는 중앙은행의 발권력으로 보전하고, 그러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증세를 통해 적자 규모를 조절하면 된다는 것이 요지다. 통화정책이 인플레이션이라는 경제 상황에 반응하는 대신 정치권에서 결정되는 재정에 종속되는 셈이다.
만일 이런 아이디어가 실제 정책화되었다면 지금쯤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까? 지난봄 1조9000억달러의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은 뒤 발생한 물가 급등에도 불구하고 다시 1조2000억달러 규모의 인프라 법안(Infrastructure Bill)을 통과시킨 정치권에 인플레이션 수속을 위한 신속한 재정적자 축소를 기대할 수 있을까? 정부와 의회의 인플레이션 정책을 신뢰하지 못하는 금융시장에는 얼마나 많은 불확실성과 혼란이 초래됐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꿈은 나랏돈을 마음껏 쓰는 것이다. 발권력으로 뒷돈을 대고자 하는 유혹은 늘 있어 왔으며, 실제 그렇게 발생한 인플레이션 사례도 수없이 많다. 이러한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제도적으로 중앙은행을 정치권에서 독립시키고 물가안정이라는 명확한 미션을 맡긴 결과, 지난 수십 년간 인플레이션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질 정도로 안정되어 온 것이다. 이처럼 성공적인 통화제도의 정착이 '현대화폐이론'과 같은 위험한 아이디어를 불러오는 배경이 되고 있음은 아이로니컬하다. 낮은 인플레이션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면서 우리가 구축했던 통화제도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진 틈새를 포퓰리즘이 파고든 것이다. '현대'라는 포장을 씌워 기존 이론은 마치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낡은 것이라는 프레이밍을 해 가면서 말이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누구누구를 지원하고, 무엇무엇을 육성하며, 어디어디를 개혁한다는 공약이 줄을 이을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그와 같은 정책의 이면에는 숨겨진 비용이 있다. 그리고 그 비용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누려왔던 기초를 허무는 것일지 모른다. 경각심이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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