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부 박원희의 “귀농은 O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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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농부 박원희의 “귀농은 OO이다”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22.06.2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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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전라북도 귀농·귀촌 우수사례 공모전 우수상작 완주 박원희

가족을 위한 무작정 귀농
2010년 경기도 부천에서 완주 봉동으로 귀농을 했다. 오랫동안 주말 부부로 살며 떨어져 지내던 차에 이렇게 살다가는 영영 같이 살수 없을 것만 같았다. 가족이 함께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귀농을 생각했고, 전주에 살고계신 아버님의 추천으로 완주군 봉동으로 오게 됐다. 그리고 지인을 따라 지역의 특산물인 딸기를 선택하고 비닐하우스 6동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에 농(農)자도 모르는데 시작부터 꽤 많은 양의 일을 하게 돼 무척 힘이 들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한 업으로 삼고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수익률에 대한 고민으로 일을 줄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힘든 시작이었지만 다음해엔 농사량을 더 늘렸다. 무모한 도전이지만 생계를 위해서는 힘든 것을 이겨 내야 했다. 딸기 8동, 육묘동 2동으로 늘려 본격적인 딸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업인으로서의 삶이 무모하면서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농업이 적성에 맞았다. 작물을 만지면 안정이 됐고, 작물이 자라는 과정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판단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귀농초기 - 농사의 옷을 내몸에 맞게 그리고 길을 찾기
귀농초기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농사일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노동을 몸에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3년차까지 딸기 재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총력을 다 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지인을 따라서 농사를 했는데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는 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농업인 대학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 무작정 덤벼들기보다는 교육을 통해 배우면서 하나씩 익혀가는 것이 농업기술을 익히는데 중요했다. 바쁜 농사일을 하며 농업대학을 다니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전문적인 지식은 교육에서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다닐 수밖에 없었다. 
농산물 유통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초기에는 선배들이 하는 대로 농협에 출하를 했다. 그런데 시중에 판매되는 딸기는 높은 가격인데 내손에 쥐어지는 수익은 많이 않은 것 같았다. 그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니, 여러 유통 단계를 거치고 물류센터의 수수료도 농업인에게 책정되는 등 문제가 있었다. 주체적인 결정권이 있는 농업인의 삶이 좋았던 나에게 농산물 가격결정권이 없다는 점은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손댈 수 없는 부분이 또 있었다. 태풍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였다. 자연재해의 피해로 물량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더더욱 판로와 가격에 대한 문제가 어려움이 됐다. 

귀농 중반기 ? 배움의 길은 언제 어디에나 필요한 듯
귀농 중반기에 농업을 확장하면서 농업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요인들을 찾아 나 자신을 채우기 시작했다. 농업 경영에 대한 전문성을, 농업 회계를 배웠다. 농업 회계지식을 통해 수입과 지출 등의 결산을 해보니 농업을 지속할수록 빚이 늘어날 것 같은 위기의식이 들었다. 그때마침 완주에 로컬푸드 직매장이 생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매장으로 우리 딸기를 들고 무작정 찾아갔다. 매장에서 팔수 있냐고 물었다. 로컬푸드 직매장이 개장한 초기여서 인지 진입장벽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필요한 교육을 받고, 절차를 거쳐 로컬푸드 직매장에 ‘민규네 딸기농장’이란 이름으로 딸기를 진열했다. 새벽마다 딸기를 따서 당일 판매를 하게 됐다. 직거래는 실시간으로 반응이 오기 때문에 판매조절을 할 수 있었고 가격경쟁력도 나쁘지 않았다. 로컬푸드 직매장에 딸기를 출하하기 시작한 이후 농장에서 생산되는 딸기의 90%를 직매장을 통해 판매했다. 딸기의 판매는 안정화됐다. 그러나 여기서 농사의 고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농사 규모가 늘어날수록 일손도 부족했고 일손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채용하고 그에 따른 연중 운영비도 창출이 돼야했다. 품목을 늘려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고 예측 가능한 농업이 돼야 했다. 여러 품목을 시험재배를 해보았다. 이중 어떤 것이 맞을지 찾아야했다.

귀농 정착기 ? 다양하면서도 안정적으로 만들어가기

귀농초기와 달기 연차가 갈수록 주변에는 경쟁상대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로컬푸드 직매장에도 계속해서 많은 농가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잉여 농산물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고 1차 농산물의 판매만으로는 수익이 해결되지 못했다. 농업인들은 고된 노동 외에도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다. 2차 가공품을 만들어야했고 새로운 것들에 도전해야했다. 도전과 시도는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을까. 농업인들이 모여 협동조합을 만들었고 군에서 제공해주는 가공시설이 아닌 과실생산자들을 위한 가공시설을 만들게 됐다. ‘퐁당’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게 됐고 우리가 생산한 과실들로 과실에 맞는 가공품을 만들게 됐다. 농업인이었지만 배움의 길은 끝이 없었다. 심고 키우고 수확하는 일이 다가 아니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계속 돼야 했고 판로는 끝이 없는 고민이었다. 

지속가능한 농업ㆍ농촌 만들어갈까
나는 언제까지 농업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당분간은 많은 이들의 건강과 가족의 식탁을 위해 농사를 짓고 싶다. 그리고 농업인들에게 필요한 조직체를 자발적으로 만들고 유지하는데 힘을 얹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주체적인 삶을 농업에서 펼치고 싶다. 
귀농하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것은 성격이 다른 부부가 함께 일하게 된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시도한 귀농이었는데 초반에는 가족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어느 날 돌아보니 작물들이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행복해야 작물도 행복하고, 더 좋은 딸기가 많이 생산된다. 마음이 편해야 그만큼 효과적으로 농장을 관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는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서로 다른 의견을 현명하게 조율하는 방법을 찾아갔다.

나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귀농이 내 삶의 뿌리 내림이었다면 이제는
농촌에 뿌리를 박고 줄기를 뻗어가 무성한 잎이 달린 나무가 되고 싶다.
커다랗게 자란 나무에 누군가 와서 편히 쉬어 갈수 있는 그늘이 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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