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배 주필
법륜스님은 “남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쌓지 마라”고 했다.
장의사가 영업이 안된다고 투덜대면 바로 그것이 죄악이다. 진정한 행복은 과정이 행복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물으면 물질적 정신적으로 잘 해주는 사람이나 내 생각을 따라주는 사람을 꼽는다. 이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내 기준에 따라 좌우된다. 내 생각과 다르거나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화를 낸다.
화는 상대와는 무관한 내 안의 도화선이며 스쳐가는 감정이다. 내가 화나는 이유는 내가 옳다는 생각, 즉 분별심 때문이다. 내 기준에 맞지 않으니까 사사건건 시비를 가리려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용서하는 것에는 관대하지만 남을 용서하는 것에는 인색하다. 거의 식자(識者)들은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는데 특히 익숙하다. 쿨하게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자기 체면을 구기거나 상대에게 진다는 자존심 때문이다. 이기려는 생각이 없으면 패배할 일도 없다
어느 아프리카 부족은 과자 따먹기 경기를 시키니 모두 손잡고 천천히 걸어가 같이 먹었다. 왜 뛰어가 혼자 먹지 않느냐고 묻자 다른 사람이 슬픈데 어찌 행복할 수 있나 라고 대답한다.
세계 14만 명의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각국의 공존지수를 조사하니 한국은 36국 중 35위였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이 최하위다. 사람을 이해와 배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상대를 경쟁자로 만든 줄 세우기 교육의 산물이다.
요즘은 실시간 문자로 상대를 욕하고 자기와 정체성이 다르면 문자 폭탄과 비난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니 소신과 양심 있는 말을 찾기가 힘들다.
+ 를 내놓고 물으면 성직자는 십자가, 간호원은 병원, 수학자는 덧셈으로 인식한다. 이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피해야 한다. 다르게 태어난 아이를 사회와 학교는 같게 획일화 한다.
사군자도 여백이 있어야 멋지듯 인생도 여백이 있는 삶이 아름답다. 그래서 스쿨은 그리스어 ‘스콜레’ 즉 여유다. 이제 우리도 여유와 여백 있는 삶을 살자! 물질의 풍요는 지금보다 부족해도 정신만은 풍요로워 해학의 웃음과 여유, 풍자를 누렸던 옛 조상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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