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은 목숨을 담보로 건 무기
상태바
운전은 목숨을 담보로 건 무기
  • 전북연합신문
  • 승인 2011.10.11 14: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수경찰서 산서 파출소 김종국경사

운전은 예술이 아니다. 목숨을 건 담보나 다름없는 무서운 무기다.그러나 운전을 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항상 불안하다.교통참사 ‘불명예’… 언제 면하나 교통사고가 많기로는 우리나라가 으뜸 이란다.

OECD국가 가운데 사망률이 최상위권이다. 어제도 또 오늘도 많은 인명이 교통사고로 사라지고 있다. 특히 자동차 사고란 사람 ? 자동차 ? 환경 등 3대 요소가 복합되어 일어난다고 말한다.

보행인과 운전자의 잘못, 도로나 기타 자동차 정비의 소홀 등을 들고 있다. 물론 잘하는 운전자도 많지만 일부 몰지각한 운전자의 횡포가 모두를 슬프게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횡단보도, 교차로에서의 사고율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도로에서 보행자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안전지대인 횡단보도에서 충돌사고가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행자나 운전자가 당연히 지켜야 할 정지선을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교통질서를 잘 지킨다 해도 상대편이 못 지키면 충돌되게 마련이고 또 그 반대로 내가 실수해도 마찬가지 참사가 일어난다. 하기야 자동차가 없이는 활동하기 힘든 시대다.

출퇴근 때도, 쇼핑할 때도, 이웃 마실 때도, 야외나들이 때도, 자동차 신세를 저야 한다. 그래서 자동차문화라는 말을 즐겨 쓴다. 이 용어가 거부감 없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많은 문제점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뒷골목의 넘치는 자동차, 거리를 온통 덮은 자동차군, 운전자들의 무질서 심리,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빙빙 방황하는 승용차들, 아직도 낮은 도로율, 서민들의 배타감정까지 함께 뒤범벅이 되어 난장판이 자주 벌어지는 것을 보면 두려움이 앞선다.

교통체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시민의 질서의식이 부족한 점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우선 운전자의 자세가 대체로 바르지 못하다. 신호위반은 다반사고 차선위반, 끼어들기, 네거리에서 꼬리를 이어 좌, 우 회전이 자주 벌어지고 있으며 주차질서도 자기중심이다.

여기에다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음주운전이나 난폭운전까지 자주 일어난다. 이 같은 교통사고 불명예… 언제 면할 수 있을까? 더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도덕적 · 정신적 기둥이 몹시 흔들리고 있다.

나라의 기강과 질서가 무너져 가고 있다. 독불장군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이래가지고야 어떻게 강하고 알찬 사회를 건설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교통체증과 사고율을 보이고 있는 나라 중의 하나다. 날이 갈수록 심각성이 더해가고 있으나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힘들다.

오히려 이제는 체념의 상태에 빠질 정도가 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산다는 것은 나만 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남도 잘해야 내가 살게 된다는 뜻을 알게 된다.

‘나’라는 생명은 내가 잘못해서 죽을 수도 있고, ‘남의 실수로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나의 나인 동시에 남의 나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라는 존재는 절반은 ’남‘의 것이다. 이 이치를 안다면 음주운전 등 철저한 이기주의적 횡포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할 때가 있다.

공간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사회생활을 떠나 살 수 없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존재가 자아(自我)와 타아(他我)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아와 타아는 서로 대립하는 것 같지만 결국 서로 결합해서 서로의 생활을 보완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이 가능하고 그런 생활 속에서 우리의 생을 이어가게 된다.

이제 ‘나’라는 존재가 ‘나’만이 아니고 남이 존재해서 가능하다고 한다면 나는 나만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살아야 된다는 논리가 힘을 얻는다.

나는 그 생존의 가능을 위해서도 남을 도와야 마땅한 것이다. 세상에선 무슨 자선사업이나 박애정신 또는 인도주의나 종교적 신앙에서 남을 위하는 일을 많이 하고 있으나, 그런 고차원적인 입장이 아니더라도 깊이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임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절반은 내가 살고, 절반은 남이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불문율이 아니겠는가. 절반은 내가 살고 절반은 남이 살도록 도와주었으니 부채를 갚는 식으로 남을 위해 배려해 보자는 것이다.

이를 실천에 옮기려면 최소한 두 가지는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과욕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금욕적인 생의 자세를 가져야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교통사고를 줄이려면 ‘남을 의식하고 배려하는 운전’이 절실하다. 너무 서둘지 말고, 서로 양보하며 배려하는 공생의 운전기술이 필요하지 않을까?생명은 단 하나다. 나로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지않도록 항상 주의하는 운전습관을 길러야 할것이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