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은 왜 보석의 도시일까
상태바
익산은 왜 보석의 도시일까
  • 문공주 기자
  • 승인 2013.08.18 17: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익산보석박물관 ‘보석의 도시, 익산’ 재조명 특별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석탑 해체 과정에서 발굴된 ‘금제사리호’는 백제인의 탁월한 금속 세공술을 드러내주는 유물이다. 뚜껑, 어깨, 둥근 몸체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백제전통무늬가 생생하게 살아있고 몸통에는 덩굴을 형상화한 인동당초무늬와 활짝 핀 연꽃무늬가 수놓아져 있다.
오는 25일까지 익산 보석박물관에서 열리는 ‘보석의 도시, 익산’ 재조명 특별전에서는 익산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유물과 함께 귀금속 공단의 조성 과정 등 익산 보석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 중이다.

# 천년을 잇는 귀금속 가공역사

익산은 보석이 생산되지 않는 지역이지만 뛰어난 국보급 사리장엄의 발굴로 백제문화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입증하였고 왕궁리 유적에서 신비의 금속 가공터가 출토됨으로써 금속가공의 원천으로 밝혀진 바 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무왕 때 천도한 백제의 옛 왕궁이었으며,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는 궁터에 사찰을 세운 독특한 유적지이다. 이곳에서는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하던 건물지를 비롯해 정원 유적, 대형화장실 유적, 공방지 유적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공방지에서는 각종 금 유리 제작용 도가니와 금?유리 편 이외에도 동, 주석, 아말감 잔류물 등이 출토되었으며 금연주, 고리 등 완제품은 물론 금판, 금못, 돋을새김 등 금제품의 제작 기법과 함께 순금과 합금제품을 제작하였다는 근거도 확인돼 익산 귀금속보석 세공산업의 정통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보석 특별시’로 발돋움하다
백제 왕궁의 부흥으로 인해 부흥했던 익산은 무왕의 부여 천도와 함께 귀금속 관련 산업이 자연스럽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차 산업으로 생활을 유지해야 했던 현실 때문에 펼치지 못했던 기술력들은 1970년대 익산이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면서 활발히 나타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매달 열리던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벨기에는 작은 박스 하나에 다이아몬드를 넣어 1억 달러를 수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고무신, 김 등을 다 수출해도 1억 달러가 안 된다’는 상공부 관계자의 보고를 받고 익산 귀금속보석 공단 조성과 함께 귀금속보석 산업을 수출특화 산업으로 집중 육성할 것을 지시한다.
이에 탄력을 받은 익산은 주요 원자재를 대부분 수입해야하는 등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세계 수요량의 90% 가까이를 생산 수출하고 귀금속 가공에서도 정밀주조기법에 의한 대량생산으로 1980년대 말까지 수출규모를 꾸준히 증가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기술자들이 익산으로 모여들었고 원광대학교, 원광보건대학교, 직업훈련원(현 폴리텍 대학 익산캠퍼스) 등 귀금속 보석관련 대학에서 전문지식은 물론 기술을 갖춘 전공자들을 배출하며 익산 귀금속 보석 산업은 더욱 발전하게 된다.

# 침체기 딛고 부활의 날갯짓
호황을 누리던 익산의 귀금속보석 산업은 1998년 IMF를 맞아 침체의 시기에 들어선다. 내수부진과 원자재 및 인건비 상승으로 내수시장이 붕괴된 귀금속보석 시장은 2000년대 들어 위험에 직면했고 3D업종으로 몰리어 기술자들은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본으로, 보석업체는 임금이 낮은 태국,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공장을 옮겼다.
위기를 맞게 된 귀금속 보석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익산시는 주얼리산업을 관광산업과 연계시켜 시너지 효과를 높이는 귀금속보석 클러스터 구축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보석박물관을 건립하고 주얼팰리스를 개관했으며 이와 동시에 R&D센터, 아파트형 공장, 귀금속보석 가공전문 창업보육센터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익산시 관계자는 “해외로 진출한 주얼리공장 U턴을 추진하며 문화관광과 연계한 체류형 관광인프라를 만드는 등 왕궁보석테마관광지 지정확대사업을 착착 추진해가고 있다”며 “백제시대로부터 이어져온 뛰어난 귀금속보석 가공 기술력과 성실함으로 글로벌 보석문화 관광 도시 조성에 온 힘을 기울이겠다”고 전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