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면 더욱 생각나는 어릴 적 내 친구, 박환기(朴煥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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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면 더욱 생각나는 어릴 적 내 친구, 박환기(朴煥岐)!
  • 박의식
  • 승인 2014.06.1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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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특별기고

그는 나(박의식, 82세, 남원시 수지면 수지양촌길 20)와 한 마을에서 태어난 연배였다. 우리는 유별나게 친한 사이였다. 살아있으면 그는 나보다 두 살 위인 84세다. 우리는 불행한 시대를 함께 살았던 사이다.

 

일제시대 대동아전쟁과 해방의 혼란을 겪었다. 6?25사변과 지리산 공비소탕 전투 속에서, 우리는 빈곤한 보릿고개와 초근목피 생활을 함께 겪었다.

 

그 이름, 박환기(朴煥岐)! 그는 남원시 수지면 고평리 양촌마을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으며 건강이 쇠약하였으나 무척 영특하였다.

그의 나이 겨우 19세, 지리산전투 때 일개 야경조의 일원으로 마을을 지키다 공비에 납치되어 지리산 깊은 골짝에서 이름도 없이 그는 홀로 얼어죽고 말았던 것이다.

 

1950년 12월 5일 밤 8시 무렵, 그날 우리 마을과 이웃 고정마을에 공비가 출몰하였다. 30여명의 무장공비가 마을을 둘러싸고 징과 꽹과리를 치며 쌀과 식량을 약탈하여 마을사람 10여명을 납치, 그들에게 짊어지게 하여 지리산으로 운반하도록 시켰다. 그날따라 지리산에는 눈이 많이 내리고 몹시 추웠다. 그날 납치된 사람들 중 4명은 동사하여 끝내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 돌아온 사람 편에 그들의 소식을 접했으나 산에 눈이 쌓이고 날은 춥고 또한 공비출몰이 무서워 아무도 시체를 찾으러가지 못하다가 그 다음해 해동한 뒤에서야 마을 사람들을 동원,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냈다.

 

이웃 고정마을에서 3명(여자1명 포함), 우리 양촌마을에서 1명, 총 4명이 이름없는 지리산 골짝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사건이었다.

 

내 친구 박환기는 야경조로 그날이 마침 숙직차례였는데 공비출몰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마을 사람들을 토굴과 피신처로 피신하도록 조치하고, 자기도 고정마을에 설치된 의용경찰 파견소에 연락하기 위해 2km를 뛰어갔으나, 공비는 이미 마을을 점령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그는 안타깝게도 그들의 포위망에 들어 체포된 채 그들이 약탈한 식량을 짊어지고 산으로 가다가 평소 몸이 쇠약했던 그는 살아오지 못하고 얼어죽고 만 것이다.

 

마을 주민을 신속히 대피시키고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고정마을 의용경찰 파견소로 한걸음에 달려간 그의 의로운 행동이 아니었으면 그 때 우리 양촌마을 주민 다수가 납치되어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고 적잖이 생명도 잃었을 것 아닌가!

 
 내 친구, 박환기는 마을을 위해 헌신, 살신성인한 의인(義人)이 되었으나 겨우 열 아홉 살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한 탓에 후계가 없어 돌보는 이 없는 불쌍한 영혼으로 지금도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그의 희생을 잊지 않으려고 그의 묘역을 벌초하고 십시일반 마음을 모아 무덤 앞에 표석을 세워놓고 지난 63년 동안 매년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아쉬운 것은 이제 마을주민 중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죽고 없거나 마을을 떠나서 점차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점차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젊은 희생을 기억하는 남아있는 친구로서 먼 훗날에도 좀 더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억할 수 있도록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여 그의 숭고한 희생에 합당한 예우를 해주고 싶고, 절차상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그의 초라한 묘역 앞에 불망비(不忘碑)라도 세워주고 싶다.

 

이것이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63년 전 민족상잔의 비극 앞에 친구를 먼저 떠나보낸, 이제 82세 노구(老軀)를 이끌고 여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의 간절한 소망이다.

 

남원시 수지면 수지양촌길 20, 박 의 식(8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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