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얼과 숨결이 담긴 민족의 꽃 무궁화의 유래 (1)
상태바
겨레의 얼과 숨결이 담긴 민족의 꽃 무궁화의 유래 (1)
  • 허성배
  • 승인 2014.06.30 13: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성배/ 칼럼니스트

  '무궁화' 어렸을 때 노래 중에 "무궁무궁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 꽃"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네! 너도나도 모두 무궁화가 되어.지키자 이 땅 빛내자 조국 아름다운 이 강산 무궁화 겨레 우리 손 잡고서 무궁화~ 무궁화 ~ 우리는 무궁화다.

  우리나라의 무궁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동진(東晉)의 지리서(地理書) 산해경(山海經)에 군자의 나라에 무궁화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더라(君子之國有薰華草朝生暮死). 라는 기록이 있다.

  또 중국의 고전인 고금기(古今 記)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지방이 하늘의 뜻인데 무궁화가 많이 피었더라 (君子之國地方千里 多木槿花)라는 기록이 있고, 예문유치(藝文類聚) 권(卷)89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무궁화가 많은데 백성들이 그것을 먹는다. (君子之國多木菫之華人民食)" 라는 기록이 있다.

   이상에서 보더라도 최소한 4세기 중엽의 한국에는 가는 곳마다 무궁화가 만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무궁화가 한국 자생(自生)인 것으로 믿을 만도 하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신라를 '근화 향'(槿花鄕)무궁화의 나라, 신라를 뜻함)이라 하였고, 구당서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중국에서 한국을 '근역(槿域)'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예종(睿宗)은 고려를 ‘근화 향(槿花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무궁화는 근대 이후부터 민족의 꽃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에서처럼 단군임검께서 이 나라를 세울 때 겨레의 영원한 표상으로 점지하신 꽃이며 오랜 역사를 두고 우리 민족의 구심점의 위치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 끊임없이 피워 온 꽃이다.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 라는 구절이 아무런 저항 없이 표현된 것도 무궁화가 오랜 세월을 통해 우리나라, 우리 민족과 인연을 맺어 온 때문이다. 다만 자두나무를 중시한 조선왕조 때에 와서 소외를 당하게 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무궁화가 한국 민족의 상징적인 꽃이라는 것을 알고 전국적으로 뽑아 없애버림으로써 큰 수난을 겪었다.

꽃나무가 한 민족의 이름으로 이처럼 가혹한 시련을 겪은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애국지사 남궁억은 무궁화 묘목을 전국적으로 보급해오다가 교도소에 투옥되었고, 동아일보 제호의 무궁화 도안도 삭제되었다. 무궁화가 태극기와 함께 한민족에게 조국을 상징하고 결속력을 키우는 강력한 존재임을 간파한 왜놈들은 무궁화를 우리 민족과 멀리 떼어놓기 위해 무궁화를 볼품없는 지저분한 꽃이라고 경멸하여 격하시키고 일본 꽃인 벚꽃을 심게 했다.

  광복이 된 지 69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매년 진해에서는 일본 꽃인 벚꽃(사쿠라) 큰잔치를 하면서도  우리나라 꽃 무궁화 잔치는 하지 않는 것은 일제에 의해 날조된 환국 배달국 단군의 역사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 때 빼앗긴 민족혼을 오늘날까지 제대로 찾지 못하고 남의 정신에서 살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다.

 매년 진해 벚꽃 축제는 이만접고 겨레의 숨결이 어린 무궁화 큰 잔치로 바꿔야 한다.

   정부 규정상 무궁화가 나라꽃이 된 것은 1949년이지만, 실제로 무궁화가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꽃이 된 것은 이미 수천 년 전의 일이다. 매, 난, 국, 죽 등 사군자가 있고 전국 각지에 진달래꽃도 피는데 왜 하필이면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선택된 것일까? 이 꽃이야말로 겨레의 숨결이 담긴 소중한 무궁화. 국민모두는 알아야 한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