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의 6. 25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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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6. 25 이야기
  • 박래윤 편집위원
  • 승인 2010.06.2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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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규저 군산역사이야기 발췌. 강왕근 학도의용군 증언 등

1. 개전 초기 군산의 실태

그동안 지속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 25 전쟁 당일 하루 전인 6월24일 0시로 해제됐다.

비상경계령도 해제되고, 간만의 주말을 맞이해 많은 병력이 외박과 외출을 나갔기에 부대에 병력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던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전역에 걸쳐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됐다.


이에 국군장병들은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으나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 부대와 치밀한 접전이 전개 됐고 북한군은 소련제 T-34전차와 SU-76자주포를 가지고 방어진지를 기습 공격을 선도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자 38선으로부터 불과 40㎞ 남쪽에 위치한 서울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사전에 치밀한 남침계획을 수립했던 북한군도 남한의 그 같은 약점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울 북쪽에 주공인 제1군단을 투입해 서울을 목표로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중부전선의 춘천과 동부전선의 강릉 북쪽에서도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이 동시에 시작됐다.

1. 7월19일 군산에 진주한 인민군 제4사단
드물게 라디오를 지니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난리가 터졌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지만 소문이 도는 와중에도 군산지역은 큰 변화 없는 하루하루일 뿐 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국군과 미군이 힘을 합치면 인민군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고, 곧 그들이 인민군을 몰아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머지 않아 국군이 평양을 함락하여 진정한 통일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람을 타고 오는 소식은 한강 인도교의 폭파, 이대통령의 피난 소식, 인민군 탱크와 따발총의 위력이 일당백의 신예무기라는 둥 정확하지 않고 불안한 정보들뿐이었다.


정확한 정보가 없는 가운데 전세가 어렵다는 소식과 북한군의 대민자세가 좋다느니 하는 북한의 민심이반 전략에 의해 시민들은 서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2. 학도의용군 활동
7.13일 폭염 속에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욕 아래 우익학생운동을 한 군산학련 소속 학생들과 일반시민 및 청년들이 군산초등학교에 모였다. 시민과 학생으로 구성된 의용군의 탄생이었다.

학생들의 경우 군산에서는 6개교 211명의 많은 어린학생들이 자의로 지원하여 교복에 태극 머리띠를 메고 훈련 한 번 받지 못하고 총만 든 채 전선으로 향했다.

계급도 군번도 없이 어깨에 태극기를 둘러맨 학도병들은 국군 7사단에 소속되어 포항전투와 하동전투등에 투입돼 젊은 피로써 조국애를 발휘했다.

7월 14일 군산초등학교를 가득 채운 의용군과 환송객들은 국군 7사단 인솔병들의 통솔 아래 군산역으로 이동하여 기차에 올라 전선으로 향했다.

현재 생존하고 계시는 학도의용군 출신 장군(강왕근)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모교의 4,5,6학년 학우 90여명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학도의용군으로 출전하게 되었다고..."

당시의 전황을 보면 낙동강 전선과, 포항 전투에서는 연일 육박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 학도의용군은 1950년 8월 22일, 포항전투에 참전했는데, 30분도 채 되지 않아 5학년 한길만 학우가 태극기에 덮여 내려오는 참상을 본 학우들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채, 의분을 삼키며 적군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진격했다.

그러던 중, 함께 출전했던 학우들 29명은 최후까지 용맹스럽게 싸우다 산화했다.

"지금도 앳된 학우들의 피맺힌 절규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아, 그 누가 그 고귀한 청춘의 꿈 돌려줄 수 있으리오 ? 하지만 자유 평화를 수호하겠다는 일념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값진 희생이 있었기에, 나라를 굳건히 지켜왔고, 오늘날 선진국 대열에 서서 번영과 발전의 희망을 다지고 있는 것입니다. "

군산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학도병이 희생된 지역으로 역사적 사실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학도의용군 사망자수 1,976명 중 군산시 211명 10.7%).

3. 지상전투
그러나 그들이 떠난 지 일주일도 채 못 된 7월 17일, 금강 너머 장항에서 쏘아 대는 포성과 17일 11시 경에 흥남동 뒷산에 박격포탄이 떨어진것을 기점으로 군산은 전쟁을 실감하게 됐다.

갑작스러운 전쟁 상황에 놀란 시민들은 우선 전군도로를 따라 익산으로 피난 가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만해도 수명의 전투경찰 대원들이 군산대 뒷산의 정상에서 기관총을 장치하고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18일 금강을 건너 군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군이 장항에 집결하자 미군제트기 일명 호주기들이 장항제련소 일대를 폭격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7월 7일 아무런 저항없이 군산에 진주한 인민군 부대는 2개 부대였다.


그 중 한 부대는 서천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나포로 들이 닥쳐 군산으로 들어 왔으며 또 한 부대는 논산 강경을 거쳐 임피쪽으로 들어 왔다

그런데 이들의 진격이 너무도 갑작스럽고 신속하여 성산면 지서의 경찰들은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에 집에도 못 들리고 있던 자리에서 무조건 남쪽으로 도망을 쳤다.

이러한 상황은 군산시도 같았는데 인민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군산 경찰서의 경찰들은 좌익 분자와 과거 좌익 활동을 한 경력(보도연맹) 때문에 전쟁 직후 군산경찰서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던 수십명의 사람들을 구별 없이 기관총으로 난사해 죽이고 달아나서, 인민군이 지하실에 들어왔을때는 수십명의 피가 흘러 발목까지 흥건했다.

인민군이 진주한 19일 중앙초등학교 도로변에는 미처 피하지 못한 경찰관 한명의 시신이 방치됐다.

이날 이후 군산은 두 달 동안 이른바 인공시대(인민공화국)를 겪게 된다

4. 두달간의 인민공화국 시절

군산에 진주한 인민군 주력은 인민군 제4사단의 병력 일부였다.

이들은 군산을 무혈 점령하고 동초등학교에서 부대를 재편성해 이리 전주 방면으로 진출해 갔다

당시 북한군의 모습은 모두 풀과 나뭇가지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대부분 16~17세 가량의 어린 청소년들로 장총을 거꾸로 맨 소년병은 키가 작아 총구가 땅에 닿을 정도였다

군산의 인민군들은 소수의 병력만 남아 옥구 군산에 내무서(경찰서)를 설치하고 선전대를 동원하여 일반 시민들에게 공산주의 이념의 우수성을 주입시키려고 학습이다 강연이다 해 수시로 사람을 모이게 했다

또한 낮에는 미군 제트기(쌕쌕이)가 군산시내를 비행하며 인민군이 모여 있는 해망굴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대니 활동하지 못 하다가 밤만 되면 노력 봉사대라 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거동 가능한 사람을 모두 동원해 산허리에 사람의 키만큼 되는 참호와 벙커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이른바 지방 빨갱이라고 불리던 군산출신 공산당들이 앞장서서 지역 유지나 우익단체 협력자 및 공무원을 색출하여 인민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살육을 자행하는 바람에 군산시민들의 두려움은 깊어만 갔다.

당시 우익인사들을 강금하던 장소는 구 형무소(현 금광동 삼성A)자리와 개정면 발산리 사마타니농장(현 발산초등학교)에 설치된 옥구 내무서였다

옥구 내무서가 위치한 시마타니농장의 금고건물은 유치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지방유지와 우익 인사들이 수감되어 초만원을 이루었다

당시 군산 시민들은 인민군을 피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갔는데 남쪽으로 멀리 간 사람은 별로 없고 주로 선유도, 오식도 등의 섬으로 많이 피난했다.

어떤 이들은 당시에는 군산시내에서 떨어진 시골이었던 나운동 부곡마을(현 유원아파트)이나 수송동 축동마을의 친척집으로 피해 있었다.

불안하고 두려운 여름이 끝나가던 9월13일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인공기간에 세상이 바뀌었다고 설치던 지방 빨갱이들은 자신들의 범죄 사실이 알려질까봐 후환이 두려워 이성을 잊어버리고 우익 인사의 집안 전체를 집단 학살하는 최후의 발악을 자행하게 된다

광란과 광기의 시절
이때 학살이 이루어진 곳은 군산시에서 15개 동이었으며 그 중 대표적인 곳은 미제면 신촌리(64명 사망)와 수송동 축동마을(51명 사망) 그리고 성산면(21명 사망)과 형무소 옆 산골짜기였다.

전체적으로는 집단 생매장되거나 우물에 수장당한 민간인이 213명(유족회 통계)에 이르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5. 미군주둔
마침내 9월 30이 오전 11시경 미군 25사단 2연대 예하 1개부대가 군산에 진출하여 동초등학교에 주둔했다.

이미 하루 이틀 전에 인민군은 후퇴하여 큰 전투는 없었고 성산 지역과 대야 인근에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수복 후 군산 지역은 공산당에게 집단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시신이 속속 발견되어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그러나 피의 살육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엔군이 들어오자 그동안 숨어서 생활하던 우익 인사들이 뛰쳐나와 좌익활동을 명목으로 무차별 집단 학살의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보복했다.

당시 월명산 기슭과 성산면 공동묘지등이 대표적인 좌익 처형 장소였다고 하며, 이때 잡혀 죽은 자들이 수없이 많다.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서로 죽이고 이웃끼리 서로 복수를 하는 참혹한 광기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어르신들을 보면 그들의 인생은 눈물과 배고픔 그리고 두려움이 점철된 삶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의 세계적 흑사병인 좌우라는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묻혀버린 인생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겨우 60년 전 군산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다

6. 군산장항이리지구 전투
한국 해병대가 처녀출전하였던 곳으로 호국충정의 일념으로 뭉쳐진 해병들이 남단 제주기지로부터 용약 출전하여 백절불굴의 해병혼으로 적과 맞서 싸웠다

1950년 7월초 천안을 점령한 북괴군 제6사단 13연대가 그 여세를 몰아 서해안을 우회해 호남지역으로 남하할 때, 해병대 고길훈 부대(1개 대대 규모)는 7월 16일 군산에 상륙, 장항 북방으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해 북괴의 금강선 진출을 저지 격파했다.

7월 20일까지 군산, 이리 방면에서 적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적의 남침을 저지시킴으로써, 38선을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이들에게 전율과 공포를 안겨 줬다.

이 최초의 전투에서 적을 격멸할 수 있었던 것은 해병대 창설의 주역으로 몸바쳤던 선배 해병들의 피땀 어린 훈련과 이를 통해 얻어진 해병 정신의 결과였다.

이 전투는 곧 이 나라 해병들이 ''귀신 잡는 해병' '무적 해병'의 신화를 창조 계승해 나갈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7. 군산의 피난민들
군산에는 전쟁 전, 북한에 공산주의자가 득세하자 우익인사들이 몸을 피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때만해도 황해도 연평과 군산간에 민선 형태의 큰 여객선이 왕래할 때라 이 배를 이용하여 남하 했다.

그 외에도 북쪽에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자유를 찾아 내려와 정착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월남자는 많지 않았고, 전쟁 당시에 군산에 거주한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이른바 2차 후퇴라고 하는 1951년 1.4후퇴 때 진남포에서 유엔군의 LST(상륙정)와 어선을 타고 온 사람들이었다.

이때 군산에 상륙한 피난민은 총 5만여 명이었는데 그중 2만5천면은 김제, 부안, 익산에 배치했고 군옥 지방에는 2만5천명의 피난민이 수용됐다.

이 시기 군산의 인구가 8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전쟁으로 어려운 시절 갑자기 2만5천의 식구가 늘었다는 것은 군산으로서는 큰 변화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산에 온 피난민들은 주로 단체 수용생활을 했다.

그 당시 수용소로는 가족 단위로 쌀을 배급해 주던 해망동 솔곳이 수용소와 부녀자와 어린이만을 수용하며 공동 배식을 하던 구암초등학교 난민 수송초 그리고 중앙초등학교 수용소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일본인이 놓고 간 유곽들과 큰 규모의 적산가옥에 피난민을 분산 수용했다.

그러나 모든 피난민들이 수용소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는데 많은 수의 피난민들이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산비탈에 움막을 짓고 생활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 군산의 시민들은 피난민들을 돕기 위하어 헌 옷가지 및 이불을 모았으며 결식 아동들을 잠시 맡아 키워주는 구호사업을 벌여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냈다

전쟁이 끝난 후 4~5년이 되자 공식적으로 수용소가 사라졌는데 피난민들 중 일부는 현 한사랑병원 근처와 수송동 새마을 동네에 집단 정착촌을 만들었다.

이밖에도 해망동 산동네와 군여고 뒤편, 흥남동 산비탈, 나운동 신풍초등학교 인근등에 모여 살며 굳센 생활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때 내려왔던 피난민 중에는 지리적 이유 때문에 황해도 사람이 가장 많으며 여러 성씨들이 내려왔지만 그 중에서도 군산에 거주하는 여씨들은 모두 황해도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 피난민 1세는 한 두분씩 유명을 달리하시고 그야말로 군산이 고향인 2세대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을 떠나 추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군산에 발 디디던 그날의 이야기를 옛날 이야기로 들려주는 시절이 됐다.

수많은 사람의 인생 행로를 바꾸어 놓은 한국전쟁은 끝이 났지만 부모형제가 헤어져 평생을 눈물로 살아가게 되는 실향민 이산가족의 고통은 반세기를 넘어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 /박래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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