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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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사랑하는 자는 야수(野獸)가 아니면 신(神)뿐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지만 젊은이들은 고독을 좋아한다.
그러나 젊은이의 고독은 애상(哀傷)과 감미(甘味)와 낭만이 깃들은 감상적(感傷的)인 경우가 많다. 혼자 생각하고 싶고 막연하게 미래를 점치면서 사상의 나래를 한 없이 펴 보기도 한다.
젊은이들의 고독이 감상주의적이라고 한다면 철학자의 고독은 승화 되고 심화되어 고고(孤高)한 경지에 이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인 ‘니이체’와 ‘에르케고르’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둘다 모두 일생동안 결혼을 하지 않고 고독한 생애를 살았다. 그러므로 이 두 철학자는 인생의 예외 자라 할 수 있다.
평범한 인생의 대열에 끼지 않고 억지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웃고 떠들며 재미있게 살아 가는데 이들은 외톨박이 처럼 홀로 사색의 경지 만을 헤메고 있었으니 고독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하는 가운데 군중속의 예외 자로 고독을 느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세를 냉철하게 관찰할 수 있었고 그러는 가운데 진리를 탐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중은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하루 세때 잘먹고 재미만 있으면 그것이 인생의 전부며 행복한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독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고독에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쾌락 으로 자기를 마비시키고 잡담이나 하기 위해 친구를 찾는지도 모른다. 고독 속에서 견디어 내면서 자기와 인생을 응시 하려면 성실한 용기가 필요 하다. 고독은 결코 안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독을 값싼 사치적 감정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문호 ‘입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고독한 인간이라고 했다.
우리는 인생의 고독을 좀 더 성실하고 지혜 롭게 생각해보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젊은이들의 값싼 감상적 고독이나 노인들의 사고무친(四顧無親)한 고독감 보다는 좀 더 인생을 깊게 관조해 보는 고독이 되어야 하겠다.
인생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는 고독이 진정한 의미의 고독이라고 느껴 진다.
고독을 심화 시켜 고고의 경지에 까지 이른 ‘니이체’같은 철학자는 못 될지라도 이들의 태도를 우리는 좀 배워야 할 것 같다. 잊혀지고 덮어진 치부는 일체의 망각이지 삼인행에 필유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의 스승은 될 수 없다.
미라보 다리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그리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르네. 밤도 오고 종도 울려라. 세월은 흘러가나. 나는 여기 머물겠네.
G.아폴리내르의 시 이다. 세월이 흐르고 사랑은 가도 나는 여기 머물겠네의 이 깊은 의지야 말로 가장 솔직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역사 의식이 아닌가 싶다. 미라보 다리가 존재 함으로 만이 그 시인(詩人)은 과거도 미래도 늘 현재와 같이 살아 숨쉬는 듯 노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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