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시대, 알고보면 일본 대중음악계의 '마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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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 알고보면 일본 대중음악계의 '마루타'
  • 투데이안
  • 승인 2011.02.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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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원의 문화비평

일본 대중음악계에 묘한 변화가 일고 있다. 지난 1월26일 발매한 소녀아이돌그룹 AKB48 멤버 이타노 토모미<사진>의 솔로 데뷔 싱글 ‘디어 제이(Dear J)’가 2월7일 오리콘 위클리 차트 2위에 올랐다. 1위는 2인으로 구성된 동방신기가 차지했다.

한국에선 동방신기의 1위 소식이 크게 부각되고, 특히 발매 첫날의 어마어마한 판매량이 화제가 됐지만, 일본 측에서는 이타노의 2위도 크게 다뤄졌다. 동방신기에는 밀렸어도 판매량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디어 제이’는 발매 첫 주 무려 16만2871장을 팔아치웠다. 이는 사실상 어마어마한 기록이었다.

여성 솔로 가수로서 첫 주 15만 장 이상 판매고를 올린 건 2007년 3월 우타다 히카루의 ‘플레이버 오브 라이프(Flavor of Life)’ 이후 4년 만이다. 더군다나 여성 솔로 가수의 데뷔 싱글이 15만 장을 넘긴 건 2001년 4월 당시 모닝구 무스메에 재적하고 있던 고토 마키의 ‘사랑의 바보’ 이후 무려 9년10개월만이다. 한때 현상적인 인기를 끈 아마네 카오루(사와지리 에리카)도 그 정도는 못 됐다.

얼핏 일본 대중문화계를 휘어잡고 있는 AKB48이니 당연한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지난해 팬들을 상대로 한 총선거에서 4위를 차지, AKB48의 인기 멤버 중 하나로 꼽히는 이타노일지라도 결국은 솔로, 1명에 불과하다. 열성 지지팬들의 응원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타노의 데뷔 싱글은 멤버 여러 명이 모인 AKB48의 각종 유닛, 프렌치 키스, 노슬리브스, 와타리로우카하시리다이 등의 실적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이타노 싱글 전주에 발매된 프렌치 키스 새 싱글 ‘이프(If)’는 6만7122장, 이타노 다음 주에 발매된 와타리로우카하시리다이의 ‘발렌타인 키스’도 9만5321장을 파는데 그쳤다.

물론 인기 멤버의 솔로 데뷔라는 화제성도 한몫했을 수 있다. 그러나 ‘디어 제이’는 그 화제성이 가신 2주차에도 2만4105장을 팔아 6위에 랭크, 첫 주에 1위를 빼앗긴 동방신기 2주차를 오히려 앞질렀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타노가 ‘디어 제이’를 들고 나오면서 보여준 ‘콘셉트’에 기인한다.

이타노는 솔로로 데뷔하면서 전형적인 섹시 콘셉트를 택했다. 파워댄스에 요염한 분위기를 내며 기존 AKB48 스타일에 파격을 가했다. 물론 AKB48도 섹시 코드가 있긴 하지만, 1980년대 오냥코클럽 수준 정도지 이타노처럼 노골적인 형태는 아니었다. 거기다 싱글 ‘디어 제이’ 역시 기존 AKB48 스타일과는 달랐다. 정교하게 구성된 일렉트로니카 댄스곡으로, 그 뛰어난 완성도 덕택에 비평계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장르를 불문하고 기존 일본 아이돌풍 틴팝에 머물렀던 AKB48 싱글들과 차이가 확 났다.

물론 이처럼 섹시 콘셉트에 수준 높은 팝을 구사하는 여성 솔로 가수들은 일본에도 많다. 대표적으로 인기장수하고 있는 아무로 나미에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에선 아이돌이 아닌 아티스트로 분류된다. 무대에서도 카리스마적이지만, 무대에서 내려와도 아티스트적인 ‘풍모’를 드러내며 카리스마적 행보를 보인다. 그러나 이타노는 이와 다르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AKB48 스타일의 아이돌이 된다. 천진하고 고민 많은 평범한 옆집 소녀다. 이런 콘셉트가 어필했으리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어딘지 짐작 가는 부분이 있을 듯싶다. 섹시 콘셉트, 완성도 높은 팝, 난이도 높은 안무, 그리고 아티스트와 아이돌 이미지를 오고가는 카리스마적 무대와 평범한 실생활 사이 갭. 정확히 한국 여성아이돌그룹이 일본시장에서 차별성을 확보하며 주목받았던 요소들인 것이다. 한 마디로 그룹 내 솔로라는 비교적 안전한 모델을 통해 기존 일본 아이돌시장을 휘어잡고 있던 AKB48부터 발 빠르게 그 벤치마킹을 실험하고 있다는 것.

이쯤 되면 AKB48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 측이 이타노 토모미 솔로로 어떤 시장방향성을 실험하고 있는지도 뚜렷이 드러난다. 애초 이타노를 선택한 부분부터가 그렇다. 물론 이타노가 개중 섹시 콘셉트를 잘 소화해낼 만한 외모와 분위기를 지니고 있긴 하다.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그러나 굳이 솔로 데뷔 명목이라면, 지난해 총선거에서 인기 1위를 차지한 오시마 유코, 지방 팬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는 2위 마에다 아츠코 쪽이 유리했다. 어차피 AKB48은 남성 오타쿠층을 상대로 수많은 싱글 사양과 노골적인 상술을 통해 음반을 팔아치우는 그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타노를 선택했다는 건, 조금 다른 식으로 생각해봐야 한다. 이타노는 멤버들 중 섹시 콘셉트가 잘 어울릴뿐더러, 기본적으로 가장 ‘무난하게’ 예쁜 외모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한국 팬들 사이에서도 이타노는 ‘입문용’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일반 대중이 봤을 때 눈에 띄고 호감을 느끼는 멤버, 한 마디로 ‘전형적인’ 미모를 지닌 멤버는 과연 어떤 계층에 어필하는 걸까. 답은 또 다시 같은 맥락으로 돌아온다. 소녀시대 등 한국 여성아이돌그룹에 빠져있는 일본 10~20대 젊은 여성층이다.

동안에 글래머 몸매, 또는 어딘지 멍해 보이는 인상, 심지어 평범하기 그지없는 외모를 선호하는 등 나름의 마니악한 취향을 지닌 남성 오타쿠층에 비해, 일본 젊은 여성층은 단연 ‘전형적인’ 미모 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동성(同性) 아이돌에 있어 동질감이나 친근함보다는 동경 심리 자극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내 각종 조사에서 소녀시대 멤버들 중 압도적인 인기도를 보여주는 건 대부분 ‘전형적인’ 미모를 지닌 윤아인 것이다.

결국 AKB48 측은 이타노 솔로 데뷔를 통해 한국 여성아이돌그룹이 물밀 듯이 몰려들어와 차지한 10~20대 젊은 여성층 시장을 빼앗거나, 최소한도 한국의 독주는 막기 위한 실험을 행하고 있다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그리고 ‘디어 제이’의 대단한 판매고는 이 같은 벤치마킹 실험이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거뒀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향후 동일 방향성 상품들이 하나둘씩 추가될 것이 분명하다. 시동이 걸린 것이다.

돌이켜보면 일본 대중문화산업은 늘 이와 유사한 시장전략을 사용해왔다. 만약 한국시장에 일본, 또는 중국 아이돌이 몰려들어와 시장을 잠식해버린다면 어마어마한 사회적 반발이 일어나고 업계에서도 정부에 블로킹 조치를 요구하는 등 난리가 나겠지만, 일본은 그렇지가 않다. 생경한 코드의 해외 문화상품이 시장을 잠식해 들어와도, 일단은 내버려둔다. 오히려 그 인기를 부추기기까지 한다. 그리고 난 뒤 해당 국가 문화상품의 특성들을 면밀히 연구, 유사 콘셉트 자국 상품들을 하나둘 개발해 서서히 시장분위기를 전환시키고 자국 상품으로 대체해나가기 시작한다.

제1차 드라마 한류 당시에도 그랬다. NHK 방영을 통해 현상적 인기를 누린 KBS2 ‘겨울연가’를 필두로 수많은 한국 드라마들이 새로운 시장 파이를 개척해 차지했지만, 일단은 그냥 내버려뒀다. 그러면서 서서히 그 특성들을 분석, 유사상품들을 개발해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영화판과 TV드라마판,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 한국드라마와 유사한 순애(純愛)물들로 시장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얽히고 설키는 플롯과 격한 감정선 등 현재 한국 막장드라마와 유사한 스타일을 지녔던 1970년대 TBS ‘붉은 시리즈’까지 리메이크해냈다. 그렇게 해서 한국 드라마 열풍 주역이었던 중장년 여성층 파이를 일부 대체하는데 성공했고, 여타 계층까지 한국 드라마로 넘어가는 상황을 철저히 막았다. ‘연공-코이조라’ ‘내 첫사랑을 너에게 바친다’ ‘하나미즈키’ 등 10~20대용 순애물들로 젊은 여성층을 ‘꽉 잡은’ 것이 한 예다.

그런데 왜 일본은 이렇듯 복잡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걸까. 일본 특유의 갈라파고스 현상이 대중문화산업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굼뜨다. 1억2700만 명의 인구, 탄탄한 내수 시장을 갖추고 있어 그 안에서도 충분히 여러 산업이 잘 돌아간다. 우리처럼 해외시장 개척이라도 해야 먹고사는 구조가 아니다. 그러다보니 별다른 도전정신이나 참신한 발상 없이도 계속 수지를 맞춰가며 잘 해나갈 수 있고, 그러면서 나태함과 모험을 두려워하는 습성 등이 몸에 뱄다.

문제는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언젠가는 대중도 환멸을 느끼고 대중문화상품 소비욕구 자체가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큰 변화 없이 유사한 상품들, 유사한 콘셉트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 조금씩 시장분위기는 저하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는 이를 극복할 수가 없다. 변화가 힘들 만큼의 타성이 배버린 데다 갈라파고스 현상 탓에 딱히 전향적인 발상도 떠오르질 않고, 전반적으로 도전이 주는 리스크를 감당하기 어려운 체질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외 문화상품의 유입을 일단은 내버려두고, 심지어 부추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체질개선을 위해 외부에서 답을 찾는 식이다. 일본시장으로선 리스크가 전혀 없는 선택이다. 뭐든지 일단 들여와 놓고, 그게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는지 아닌지만 관찰하면 되는 일이다. 해외 문화상품은 한 마디로 시장 실험용 기제다. 그래서 먹히면, 시장대체 작업에 들어간다.

일본 대중문화시장은 이런 식으로 수많은 이득을 취했다. 돌이켜보면 제1차 드라마 한류가 개발해준 중장년 여성층 시장, 제2차 아이돌 한류가 개발한 10~20대 젊은 여성층 상대 동성(同性) 아이돌 시장 등은 일본 대중문화시장 습성으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시장 빈틈이었다. 혹 가능성을 감지했다 하더라도 너무 큰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제대로 발 한 번 못 담근 채 내버려뒀을 시장이다. 결국 남이 지은 밥을 자기가 떠먹는 식으로 일본 대중문화시장은 트렌드 산업으로서 자기위치를 공공연히 다질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제2차 아이돌 한류를 맞이한 한국은 이제 또 다른 고민을 해봐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일본시장의 실험용 기제로서만 일시적 수익을 얻어내다 제1차 드라마 한류 당시처럼 게토화 된 오타쿠 시장으로 밀려나버리는 수모를 당하지 말고, 이를 지속가능한 한류, 탄탄한 시장 파이로 굳히는 방안들을 모색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마침 지난주 오리콘 싱글 차트에선 모닝구 무스메 소속 헬로 프로젝트 유닛 보노가 새 싱글을 발표, 9위를 차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별다른 성과는 아니지만, 그 콘셉트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보노 세 멤버는 터프한 로커 스타일 차림에 마찬가지로 가벼운 록이 가미된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 마디로 걸파워 콘셉트다. 보노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팔랑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나와 낯간지러운 동요풍 틴팝을 불러대던 전형적인 남성 오타쿠 시장용 그룹이었다. 일본 기획사들 중 가장 변화가 느리다는 헬로 프로젝트 측에서조차 이런 식으로 벤치마킹형 변화를 주고 있다.

시간이 급하다. 급작스런 인기에 취해 잠시라도 안주하다간 다시 시장을 빼앗기게 된다. 업계의 치열한 고민과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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