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이 오금(五金)을 얻다! 익산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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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이 오금(五金)을 얻다! 익산토성
  • 문공주 기자
  • 승인 2012.12.1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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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캐는 청년이 어떻게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을 하고 백제 제 30대 무왕이 되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금마와 왕궁리유적이 내려다보이는 익산토성에서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인 서동은 익산 마룡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백제 수도 남쪽 연못가에 사는 과부가 용과 정을 통하여 출생하였으며, 어렸을 때 오금산에서 마를 캐며 지냈으므로 서동이라 불렸다.
서동은 서라벌 아이들에게 마를 주고 선화공주가 밤마다 맛동방(서동)과 몰래 노닐었다는 헛소문을 퍼트린다. 결국 왕에게 노여움을 산 선화공주는 쫓겨나 서동을 따라가게 된다.
선화공주는 어머니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앞으로 살아갈 일을 서동과 의논하게 되는데 금을 본 서동은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이 많이 있음을 공주에게 알린다. 서동은 오금산에서 얻은 금을 신라 진평왕에게 보내 신임을 얻고 인심을 얻어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오금산에 자리 잡고 있는 산성이 익산토성(사적 제92호, 1963년 지정)이다. 익산토성의 동편에는 미륵산으로 통하는 도로 건너에 저토성이 있다. 이 산 남쪽으로 왕궁리유적이 있고 다시 여기서 동편으로 1.3km가량 떨어진 지점에 제석사지가 있다.
익산토성은 둘레가 약 690m의 성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성의 규모와 구조가 대략 밝혀졌는데 토성으로 축조하고 남문이 있는 골짜기는 석축한 것이 확인되었다. 현재 산성 내에는 남문지와 수구지, 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오금산성(五金山城)’, 보덕성(報德城)‘ 이라 불리어 진다. 오금산성은 백제 무왕이 어려서 이곳에서 마를 캐면서 오금을 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동이 오금산에서 큰 금덩이 다섯 덩이를 얻게 된 것은 홀어머니에게 효심이 커서 그랬다는 말도 전해온다.
보덕성은 보덕국왕인 안승이 670년 6월 금마저(金馬渚=현 익산)에 자리 잡은 후 684년 11월까지 보덕국이 자리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80년과 1984년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2차에 걸쳐 익산토성 발굴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볼 때, 이 성의 축조 시기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로서 백제 무왕과 관련하여 쌓아진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유물이 같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시대 말기에 축조되어 오랫동안 사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성의 주변에서 거친무늬거울과 한국식동검 등 청동유물이 출토되었다.
2010년 11월 무왕과 왕비릉인 익산쌍릉에서 시작해서 익산토성, 미륵사지, 구룡마을 뜬바위와 대나무숲을 지나 서동공원으로 이어지는 익산둘레길 3코스인 무왕길(18.4km)이 조성되었다.
현재 이 무왕길을 걸으며 많은 사람들이 무왕의 탄생과 사랑, 웅지 등 1400년을 뛰어 넘어 무왕을 만나고 백제왕도의 향기를 느끼고 있다.
/익산=문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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