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前轍)이라 쓰고 암살이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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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前轍)이라 쓰고 암살이라 읽는다
  • 조병현
  • 승인 2013.12.24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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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 중에 예술이 있다. 그 중에서도 언어를 매개로 인간의 감성을 담아내는 그릇이 문학이다. 작가들은 자신의 예술성을 자기만의 방법대로, 감정대로 작품에 녹여낸다. 그런데 작가가 표현한 이 문학작품들을 일반 대중들이 온전하게 이해하기엔 대체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작품이 문학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리매김하는데 다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비평이요 비평가다. 
 작품을 이해하는데 작품이외에 작가의 환경(가족, 가치관, 생활습관, 경제적 상태, 교육, 고향, 결혼유무, 국가, 역사, 시대 등)이 작품에 영향을 준다고 믿고 이 모두를 참고해서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역사주의비평과 사회학적 비평이다. 또 소극적으론 심리주의 비평도 이에 속한다. 이 비평들은 비교적 작품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반면, 작품이외의 것에 너무 치중하다보면 작품에서 말하려는 것보다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갈 수도 있다. 반대로 구조주의비평이나 형식주의비평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작가의 환경을 배제하고 오로지 작품 안에서만 의미를 파악하려한다. 따라서 작품 외에서 생기는 오해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그러면 오해는 어디에서 비롯될까? 사실적인 객관을 잃은 개인의 욕심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성경에서 좋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한 후,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했다. 그러나 뱀이 하와에게 이에 대해 묻자 여자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했다고 대답했다. '반드시 죽으리라'와 '죽을까 하노라'는 확연하게 다르다. 이미 하와에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자하는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욕심이 상대의 말을 왜곡한다.

 ■전철과 암살의 사이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라는 무기로 공안통치와 유신통치를 했지만, 자신이 만든 무기에 의해 자신이 암살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텐데, 국정원이라는 무기로 신공안통치와 신유신통치로 박정희 대통령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국민의 경고를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총체적인 난국을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박근혜 대통령뿐이며, 오만과 독선, 불통을 벗어던지고 국민의 곁으로 다가오기 바랍니다."(민주당 양승조의원이 최고위원회의에서 밝힌 발언 발췌)
 필자가 보는 공식은 이렇다. '박정희①대통령⇒②중앙정보부⇒③공안통치 및 유신통치⇒④암살'. 박근혜①대통령⇒②국정원⇒③신공안통치 및 신유신통치⇒④??. 현재 박근혜대통령이 3단계인 유신통치라는 데까지 전철을 밟고 있으니 그 길을 버리고 돌이키라는 간곡함(국민의 곁으로 다가오기 바랍니다)으로 들린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암살'이라는 발언을 문제 삼아 양승조의원 의원징계(제명요구)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신공안통치 및 신유신통치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한 게 아니라 암살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에 대한 이의제기다. 그렇다면 새누리당도 현재 박근혜대통령도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독재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즉 3단계까지 이미 와있다는 것에 대한 공감은 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마지막에 나오는 암살이라는 단어가 그렇게도 귀에 거슬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새누리당은 역사주의비평의 입장처럼 작품이 아닌 주변의 것에 치우쳐 본질에서 떠나 엉뚱한 곳으로 간 것은 아닌지, 또한 하와처럼 욕심에 가리어서 '반드시'를 '죽을까'로 듣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다. 자라와 솥뚜껑은 반드시 다를뿐더러 가려져야 할 일이다. 요즘 세상, 전철이라 쓰고 암살이라 읽어댄다. 그러나 어찌 전철이 곧 암살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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