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구국정신
상태바
우당 이회영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구국정신
  • 허성배
  • 승인 2015.06.07 15: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성배/논설위원

2015년 11월 17일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께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여순감옥에서 순국 한지 83주년 되는 해이다. 우당은 구한말 이조판서 이유승 대감의 4남으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성재 이시영 선생의 바로 위 형이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그해 겨울 6형제 전 가족 40여 명이 모든 재산을 정리해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나라가 망하는데 가문과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냐면서…. 이후 35년간 중국을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다가 광복 후 살아서 돌아온 분은 다섯째 이시영 선생 한 분이었다.
우당 선생은 망명 이듬해 지린성 유화현 삼원보 추가 가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이상룡, 이동녕 선생 등과 10년 동안 3500여 명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여 무장 독립 투쟁의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지난 권위주의 시대에는 아나키스트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국민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공산권이 붕괴하고 중국 · 러시아와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우리 학계에서도 아나키즘과 무장 투쟁을 활발히 연구하게 되자 뒤늦게 우당 선생의 업적이 부상되기 시작했다.

우당 선생은 자신의 생명은 물론 엄청난 재산과 가족들까지 모두 조국 독립 제단에 바쳤으니, 세계 식민지 해방 투쟁 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한 사례다. 뒤늦게나마 우당 선생이 주신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첫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iesse oblige)의 고귀한 실천이다.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가진 자, 배운 자, 고위직에 있는 자들의 자기 성찰이다.
둘째,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다. 우당은 유학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혁신적인 양명학을 수용하였고 서양의 새로운 사상과 문명을 받아들여 개혁을 추구하였다. 셋째, 타협과 양보와 화합의 본보기다. 우당은 평생 수많은 일을 도모하고 조직하고 운영하였지만 단 한 번도 스스로 대표나 회장직을 맡은 적이 없다. 넷째, 일체의 경계와 한계를 초월하는 개방적인 세계주의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최고 가치로 지향하는 아나키즘(anarchism)을 과감히 수용하면서 반제국주의 노선에 동참, 국적 인종을 불문하고 동지로 받아들였다.
  우당 선생 순국 83돌을 맞아 선생의 애국. 애족 구국. 화합과 범 인류애 정신을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는 시대정신으로 삼을 것을 감히 필자는 제의하면서 다시금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빌면서 우당의 업적은 우리 국민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