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만 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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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만 애달프다
  • 허성배
  • 승인 2015.07.2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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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배/논설위원

선거철이 아닌데도 정치인들의 ‘민비 어천가’가 난무한다. 너도나도 틈만 나면 ‘의민가’를 노래한다. 무용론(無用論)까지 나오는 한국 정치에 ‘분노 정치’라는 섬뜩한 화두까지 보탠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거부권 행사 발언에도 ‘국민’ 단어가 31개나 들어 있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한술 더 뜬다. 박 대통령의 독재.독주를 맹비난한 호소문엔 국민이 36번이나 언급됐다. 주권재민 국가에서 국민(주인)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대통령.국회의원(대리인 또는 머슴)이 국민을 떠받들겠다는데 토를 달 일은 아니다.

 문제는 머슴이 입으로만 주인 찬양을 외칠 뿐 실제로는 주인을 궁지로 몰아넣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이다. 주인이 대리인의 도덕적 해이를 직시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은 재무경제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논제다. 주주가 회사 주인이라 해도 견제와 감시가 없으면 대리인인 경영진은 주주 이익에 매달리는 척하며 자기 이익을 좇는다는 게 그 요체다.

 그러니 회사 내 감사를 두고 사외이사제를 도입해서라도 경영진을 감시해야 한다는 게 결론이다. 이런 대리인의 도덕적 해이가 대한민국 각 분야에서 판을 친다. 국민의 이익은 안중에 없고 자기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집단만 득세한다. 그런데도 대리인을 견제할 장치는 고장 나 있으니 나라가 잘 돌아갈 리 만무하다. ‘선(先)사액 후(後)국익’의 대표 집단은 정치판이다.

박 대통령발(發) ‘배신 혈전’도 대리인 문제의 파생이다. 박 대통령과 ‘배신자’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는 자기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국민 정치’를 내세웠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정치’다. 국민은 벼랑 끝 경제가 당.청, 친박.비박, 여.야 간 권력 놀음의 희생양이 되는 순서를 생중계로 보고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경제 걱정’을 입에 달고 다니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해 막장 ‘분탕질 싸움’을 일삼는다. 야당 정치인도 오십보백보다. 100만 청년실업자의 피눈물을 조금이나마 닦아줄 ‘민생(民生)’ 법안은 수년째 깔아뭉개면서 자신의 인기를 위한 ‘정생(政生)’ 법안 처리는 일사천리다.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해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는 헌법 조항은 초선 때나 한번 읊어보는 일회용 반창고일 뿐이다. “정치인은 국익이 아닌 재선만을 위해 행동한다”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뷰캐넌의 일침은 한국 정치의 자화상이다.

국가 근간인 관료 사회도 오십보백보다. 공무원에게 애국심과 사명감은 아득한 전설이다. 선배 공무원은 국가 발전에 헌신한다는 자부심과 퇴직 후 연금으로 그럭저럭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일념에 밤샘 근무도 자청했다. 요즘 공무원은 딴판이다. 입법 권력에 눌려 무력해진 관료들은 국민을 위한 행정입법 묘수를 짜내려 하기보다 국회의원 입맛에 맞는 의원입법에 묻어가려 한다.

 일찌감치 대통령으로부터 ‘관피아’ 낙인이 찍힌 데다 ‘혈세 도둑’ 취급을 받으며 연금도 줄게 됐으니 공복(公僕) 위상은커녕 사복(私服) 지키기에도 힘이 부친다. 여기에 노트북을 멘 채 세종시에서 서울 국회의사당까지 150㎞ 도로 위를 맴도는 장돌뱅이 신세까지 됐으니 더 말하면 뭐하랴. 얼마 전 보건 당국의 메르스 관련 병원 이름 ‘오류투성이’ 발표는 과거 공무원 사회에선 상상도 못 할 ‘일대 사건’이다.

이런 공무원을 향해 대형 사태가 터질 때마다 무능.무책임한 초동 대응을 질책한들 부질없는 일이다. 최근 3세 경영 대기업의 잦은 실책도 그 근원은 같다. 한 분석전문가는 “3세 기업의 경영진을 만나면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며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1세와 혹독한 경영 수업을 받은 2세 밑의 경영진은 딴생각을 안 하고 죽을 둥 살 둥 일만 한다.

 그러나 업무 파악도 제대로 안 된 3세 아래의 일부 경영진은 겉으론 긴장하는 척하지만. 속으론 여유만만하며 제 실속을 챙긴다”고 했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금융지주그룹 위험도도 어찌 보면 대리인인 회장들이 금융발전 노력은 뒷전인 채 연임에만 온 정신이 팔려 일어나는 대리인의 도덕적 해이 탓이 크다.
기업이 사달 나면 국민도 힘들어진다. ‘수능 재주 역능 복주(水能載舟 亦能覆舟)’. 순자에 나오는 말이다. 물(주인)은 배(머슴)를 띄울 수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주인인 양 허세 부리는 머슴들은 이 경고가 두렵지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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