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이 아니라 독립만세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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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 아니라 독립만세시위다
  • 장세진
  • 승인 2016.03.2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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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진/방송·영화·문학평론가

지난 3월 1일은 제97주년 3.1절이었다. 또한 교단을 떠나 백수가 된 첫 날이기도 했다. 백수가 된 첫 날 오지랖 넓게도 잘못된 ‘3.1운동’이 떠오른다. 사실은 오래 전부터 ‘3.1운동’이 목에 가시가 걸린 듯했다. 일제의 총칼에 귀한 생목숨 잃어가며 독립만세를 외쳐댔는데, 그것이 어떻게 운동이란 말인가?

굳이 사전을 찾아볼 필요도 없지만, 운동은 “사람이 몸을 단련하거나 건강을 위해 몸을 움직이는 일”이다. 물론 운동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며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일”이란 뜻도 갖고 있다. 그럴망정 아무래도 운동은 건강과 짝을 이루는 단어이다. 많은 이들에게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3.1운동이란 용어에 대한 부당성 제기는 꾸준히 있어왔다. 일례로 2014년 신병국 원광학원 이사장은 ‘3.1운동인가 3.1혁명인가’(전북일보, 2014.3.3)라는 칼럼을 통해 ‘3?1혁명’으로 부를 것을 주장했다. 2015년에도 한겨레 박창식 논설위원이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란 칼럼을 발표한 바 있다.

그 칼럼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특강에서의 ‘3?1혁명’ 주장 사실도 밝혀 놓고 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최근의 칼럼 ‘지금은 3?1혁명 정명을 찾을 때’(한겨레, 2016.3.1)에서 대놓고 3?1운동 아닌 ‘3?1혁명’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훨씬 이전에도 3?1운동을 거부한 일이 있다. 비록 소설이기는 할망정 이문열은 그의 장편소설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1984년)에서 3?1운동을 ‘제1차 수복전쟁’ 혹은 ‘기미평화전쟁’이라 명명한 바 있다. 김원일 소설가 역시 대하소설 ‘늘 푸른 소나무’(전 9권, 1993년)에서 3?1운동을 ‘3?1민족해방만세시위’라 표현했다.

그런 글들을 보며 알 수 있는 공통점은 3?1운동이 우리 민족 스스로 ‘알아서 긴’ 용어란 사실이다. 일제침략기때야 그렇다치더라도 1941년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나 1944년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도 ‘3?1대혁명’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이후인 1948년 제헌의회의 헌법초안에도 ‘3?1혁명’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이 3?1운동으로 격하 내지 폄하된 것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다. 유진오가 마련한 초안에 들어 있는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의 ‘3?1혁명’을 이승만과 한민당 떨거지들이 ‘기미 3?1운동’으로 깎아내려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조차 학교 도서관 비치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득시글대는 오늘이다. 아직도 친일파 후손들이 지배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나라인 것이 부끄럽고 슬프지만, 그러나 3?1운동만큼은 바로 잡아야 한다. 김삼웅이 주장한 자주독립?민주공화?신분해방?비폭력?국제평화 등 혁명으로서의 거창한 당위성은 다 필요없다. 앞에서 잠깐 말했듯 무엇보다도 3?1운동이 몸을 단련하거나 건강을 위해 움직인 일은 결코 아니어서다.

배다지 민족광장 상임의장은 ‘삼일운동이 아니라 삼일항쟁이다’(한겨레, 2016.2.25)에서 ‘삼일항쟁’을 주장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시작한 ‘반제항일 민족항쟁은 4월말까지 이어졌다. 전국적으로 1500회의 항쟁에 참가한 인원은 200만 명에 이른다.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6000명, 피검자는 4만 6900명에 달하는 동학농민항쟁을 능가하는 항쟁이었다는 것.

이제 명백해졌다. 혁명이든 항쟁이든 그것이 절대 운동일 수는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운동과 혁명이 지금도 친일파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이 땅의 정쟁 대상이 된다면 아무런 윤색도 없이 있었던 그대로인 ‘3?1독립만세시위’라 부르면 어떨까? 정부가 오리무중이라면 언론이나 민간의 캠페인부터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듯하다.

97주년 3.1절이자 백수 첫 날 이런 논의를 하고 보니 그냥 백수만은 아닌 셈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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