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무장읍성 조선시대 해자-적교시설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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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무장읍성 조선시대 해자-적교시설 확인
  • 김종성 기자
  • 승인 2016.11.02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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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읍성 7차 발굴조사 결과 '최대 규모'

고창군(군수 박우정)이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의 허가를 받아 (재)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윤덕향)에서 올해 4월부터 발굴조사 중인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7차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 해자 및 최대 규모의 적교시설이 확인됐다고 1일 전했다.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1417년(태종 17년)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해 만들어진 현(縣)에 축조된 것으로 사적 346호로 지정됐다.
전라도 읍성 중에도 해자가 설치된 곳은 다수가 확인됐으나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규모와 성격이 파악된 곳은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이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종실록 기록을 살펴보면 해자는 2,127척, 성벽은 1,470척으로 성벽보다 1.4배 정도 큰 것으로 파악됐으며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그 실체를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해자는 시기를 달리해 2기가 확인됐고 초기 성벽과 동일 시기로 판단되는 초축의 해자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호안석축으로 이뤄진 반면에 옹성 축조 시 조성된 후대의 해자는 자연 굴광면을 이용했다.
초축의 해자는 성벽 기저부에서 5.2∼6.4m 정도 간격을 두고 설치됐으며 폭은 위치마다 차이가 있지만 상부 4.2∼8.2m, 하부 2.3∼5.3m 정도다.
내부에서 적교시설로 추정되는 목주열이 나중에 축조된 옹성의 하부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호안석축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촘촘하게 박은 말목열은 기존에 다른 읍성의 해자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사례로 해자의 축조방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후대의 해자는 초축 해자가 폐기된 후 읍성 내부의 물을 배출하는 배수로 역할까지 병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방어시설로서 해자와 성벽의 간격이 옹성부분에서 1/2 정도로 좁혀지는 양상이 일반적이나, 이번 무장현 관아와 읍성의 후대의 해자는 오히려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어 특이한 구조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후대 해자에서는 해자를 건너는 적교(吊橋)시설도 확인됐는데 정면 3칸, 측면 2∼4칸의 규모로 직경 30∼40cm 내외의 대형 목재를 2중으로 받치고 있는 교각구조를 하고 있다.
평면형태로 볼 때 중앙부는 마차 등을 이용한 물자 이동로로, 양측면은 사람들의 이동로로 구분되는 것으로 판단되며, 현재까지 확인된 해자의 적교시설 중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최대 규모의 적교시설은 2015년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정면 14칸(54.5m), 측면 3칸(11.5m)의 국내 최대 규모의 사창건물지(社倉建物址)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등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읍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고창군과 (재)호남문화재연구원은 1일 오후 4시 관련 연구자들과 고창군민을 위한 ‘학술자문회의 및 현장공개 설명회’를 개최했으며 연구자들을 위한 연구자료 제공과 고창군민들에게 우리 문화재의 중요한 가치를 알리고 발굴성과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 발굴 현장: 전북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58-36 일원(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발굴조사 현장)
/고창=김종성 기자·kjs56730@daum.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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