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종교개혁가 ‘루터’ 영화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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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종교개혁가 ‘루터’ 영화를 만나다
  • 옥필훈
  • 승인 2017.10.2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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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비전대학교 옥필훈 교수

2017년 10월 18일 개봉된 에릭 틸 감독의 ‘루터’는 위대한 종교개혁가    의 삶과 그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 오직 은혜만으로 (sola gratia) ! 오직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 !으로 요약되어진다. 당시 로마카톨릭교회가 믿음의 중요성과 하느님의 은혜와 성서의 권위에 대하여 무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성서를 해석하는 교황의 권위를 그 위에 세웠고, 특히 성베    드로 성당의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 등에 대해 성직자들의 불신을 사게 되어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정문에 걸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1483년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의 아이스레벤(Elsleben)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 (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률가가 되어 사회적 성공을 하게 하려고 아들을 에르푸르트(Erfurt) 대학교에 입학시켜 루터는 법학을 공부하였다. 루터가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던 중, 집에 가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에 뇌우(雷雨)가 옆에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제서품을 받고 1507년 에르푸르트 성당의 사제가 되었다. 수도회에서는 그를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교에서 공부하게 하여 1512년 신학박사가 되었고, 동대학의 스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교수는 루터를 성서학 교수로 임명하였다. 루터가 얻은 평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리를 수호하려는 폭발적인 열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걸음으로써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루터는 특히 마지막 95조 논제 ‘그리스도인은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불타는 연옥으로부터 영혼이 곧장 날아오른다’고 도미니쿠스회의 요한네스 테첼(Johann Tetzel)신부는 신자들을 유인하고 다녔던 때였다. 루터가 자신의 주장 포기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이단 재판에 넘기려고 로마로 소환지시하게 되었으나 프레데릭(Frederick) 선제후와 대학이 이것에 반대하면서 카에탄(Thomas Cajetan) 추기경이 그를 심문하도록 주선하였다. 추기경은 루터로부터 ‘나는 뉘우친다(revoco)’라는 말을 얻어내지 못하자 프레데릭 선제후에게 편지를 써서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위협섞인 강권을 하였지만 선제후는 루터를 보호하였다. 루터는 동료인 칼슈타트와 함께 라이프치히로 가서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잉골슈타트의 교수였던 엑크와 라이프치히 신학논쟁(The Leibzig Debate)을 벌여 엑크(Eck)가 주장하는 로마교회의 순종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주장하자 추후 엑크는 라이프치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하여 1520년 6월 24일 루터의 출교에 대한 교황의 교서<<Exurge Dominie>>를 이끌어냈다. 교황 레오 10세는 60일간의 말미를 주면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파면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또한 루터를 최종적으로 파면하는 교황의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로마교황은 이렇게 말한다)는 1521년 1월 3일 로마에서 공포되었다. 교황의 파면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릭 선제후를 비롯한 독일의 영주들은 보름스 국회(Diet of Worms)에서 루터가 자신을 위해 변호할 기회를 얻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고,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 5세는 루터의 신변의 안전보장을 약속하였지만 믿을 바가 못되었다. 1521년 4월 16일 루터는 보름스에 도착하여 청문회에 참석하여 트리에르(Trier) 대주교의 고문관은 두 가지 질문 즉, 그대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을 그대의 것으로 인정하는가 ? 그대는 이 책들에서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 에서 첫 번째 질문에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라 시인하고 두 번째 질문에는 하루의 여유를 구하여 4월 18일 루터는 카를 황제 앞에서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 (중략) 내 양심은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라는 답변을 하게 된다. 카를 황제는 3주 이내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것과 도중에 설교와 저술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으나, 보름스를 떠나는 도중 루터는 프레데릭 선제후가 미리 주선한대로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가서 ‘강제된 휴가’동안 독일어 성서번역에 주력하였다. 루터가 번역한 고지독일어(高地獨逸語, Hochdeutsch)는 독일민중들로 하여금 성직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서를 읽고 그들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표준 독일어가 되었기 때문에 독일어와 문법이 통일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였다. 당시 42세인 루터는 1524년 6월 13일에 로마카톨릭 수녀인 26세인 카타리나 본 보라와 결혼을 통하여 자신이 설교한 것을 몸소 실천하면서 본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1546년 1월 17일 마지막 설교 후 6일 뒤 자신의 고향 아이스레벤으로 돌아왔고, 1546년 2월 18일에 루터가 사망하던 밤 의사와 친구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는데,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계속 암송하면서 서서히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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